교묘한 분식수법에 외부감사는 '지뢰찾기' 게임
금감원, 대우건설 분식회계 규명에 1년 9개월 소요
기업들의 분식회계가 갈수록 대형화·지능화되고 있다. 기업의 매출규모가 갈수록 커지는데다 분식회계 수법 또한 교묘해져 외부감사인이 회계분식을 찾아내기가 더욱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다.
회계전문가들은 이를 '지뢰찾기' 게임에 비유한다. 기업들의 매출규모가 크고 사업구조가 복잡해질수록 분식을 찾아내는 난이도는 기하급수로 올라간다는 것이다. 면적이 좁을 때는 단시간 내 지뢰를 찾을 수 있지만 면적이 넓어질수록 지뢰를 밟을 확률이 제곱으로 높아진다.
회계감사도 그렇다는 것이다. 게다가 지뢰를 숨기는 기법이 교묘해져 두눈 뜨고 당할 수 있다고 하소연한다.
실제로 분식회계를 밝혀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검사권을 가진 금융감독원이 분식회계 혐의를 접하고 감리에 착수해 제재를 가하는데까지 걸리는 시간을 보면 알 수 있다.
금감원은 지난 2013년 12월 '대우건설이 1조원에 가까운 분식회계를 저질렀다'는 퇴직 임직원의 제보를 받았다. 그후 조사에 들어가 분식회계 혐의를 밝혀내고 과징금을 부과하는 제재를 가하기까지 무려 1년 9개월이 걸렸다.
이처럼 금융당국이 내부자 제보를 받아서 막강한 감리권한을 갖고고 들여다봐도 분식혐의가 밝혀지기까지 수년의 시간이 걸리는 게 대기업 회계다.
하지만 대기업 외부감사를 담당하는 회계법인들에겐 내부자 제보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다. 더욱이 외부감사에 주어진 시간도 1~2개월에 불과하다. 그러니 애시당초 회계법인에게 기업의 분식회계를 찾아낼 책임을 지우는 것 자체가 무리라는 지적이 나올 법한 셈이다.
대우조선해양의 5조7000억원 규모 분식회계 사건이 터지고 건설업·조선업을 포함하는 수주산업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졌다. 수주산업이 마치 분식회계의 주범으로 몰리는 분위기다.
그러나 회계업계 전문가들은 수주업뿐만 아니라 여러 산업 분야에서 지능적 분식회계 방식이 자행되고 있으며 이는 우리경제를 야금야금 갉아먹는 '기생충'과 같다고 지적한다.
회계업계 관계자는 "산업 분야를 막론하고, 특정 회계이슈가 고의성 있는 '분식회계'인지 단순 '회계오류'인지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며 "산업별로 발생할 수 있는 분식회계 유형과 특징에 대한 근본적 고찰과 대비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금감원 수주업 공시기준 강화해도 산업계 곳곳에 '구멍'
금융감독원은 대우건설·대우조선해양 등 수주산업에서 연이어 대규모 회계부정 사건이 터져 나오자 공시기준을 강화하고 나섰다. 건설업과 조선업의 경우 공사진행률과 미청구공사대금 등 분식 여지가 있는 항목의 회계투명성을 높여 회계절벽을 방지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지난 7월에는 수주업 영위기업을 외부감사할 때 공사진행률 등의 적정성 검토에 해당분야 전문가를 활용한 경우, 그 상세내용을 감사보고서에 반드시 공시하게끔 서식을 바꾸겠다며 더욱 촘촘한 규칙의 추가를 예고했다.
수주업 특성상 공사나 선박건조에 오랜 시간이 걸리므로, 매출을 따질 때 공사진행률을 적정하게 판정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총 공사비 2조원의 프로젝트를 수주했는데 기술부족 등으로 예상보다 많은 공사비가 투입됐다면 공사진행률 조작의 위험성이 커질 우려가 있다.
공사비는 1조원을 투입하고도 진행률은 30%에 그쳤다면 4000억원의 손실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공사비 투입액을 기준으로 진행률 50%로 회계처리 한다면 매출이 그만큼 부풀려져 손실을 감출 수 있게 된다.
미청구공사대금을 악용한 분식회계는 무리하게 수주한 해외공사 현장에서 자주 발견되는 사례다. 공사비용이 예상보다 초과해 손실 처리해야 할 것을 자산으로 잡아 '회계절벽'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경우 외부감사를 진행할 때 "발주처와 협상중"이라고 얼버무리지만 내막은 기업만 알뿐 감사인은 알 수 없는 영역인게 대부분이다.
이렇게 숨겨진 손실은 프로젝트가 완료되면서 일순간 봇물 터지듯 쏟아지게 된다. 이때 특정 회계연도에 부실을 한꺼번에 털어내는 회계기법인 '빅배스'냐 아니면 '분식회계'냐를 가려내야 하는 과제가 남는다.
금융당국은 수주산업의 공시기준을 강화함에 따라 회계투명성이 높아지는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고 평가하는 모양새다. 하지만 분식회계는 특정 업종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라는 게 문제다.
업종별로 회계분식을 할 수 있는 구멍이 각각 다르게 나있기 때문이다. 부실경영을 숨기기 위한 분식도 문제지만 세금을 줄이기 위한 분식까지 감안하면 분식회계는 업종을 불문하고 천태만상의 모습을 띠게 된다는 것이 정설이다.
무엇보다 정형화 된 분식회계 수법이 없다는 사실이 외부감사인에겐 큰 위협이 되고 있다. 업종별로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고 있어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알 수 있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수출·유통업, 매출채권 늘려 자산 부풀리기 만연
수출·유통업의 경우 물품의 매출단가를 높여 기재함으로써 이익을 부풀리기 일쑤다.
수출·유통기업인 모뉴엘은 수출액을 부풀린 뒤 수출채권을 금융기관에 할인판매하는 팩토링 거래로 수년간 3조원 규모의 회계를 분식한 혐의로 지난 2014년 적발됐다.
이렇게 선적서류에 대한 전문적인 식견이 있는 금융회사도 감쪽같이 속여서 매출을 부풀리는 분식회계는 외부감사인으로선 두눈을 뜨고도 당할 수 밖에 없게 만든다.
모뉴엘은 허위명세서, 가짜신용장 등 허위 선적서류를 제시해 수출채권으로 인정받아 국내 금융사에 할인판매해 자금을 융통하는 수법을 썼다. 판매한 수출채권의 만기가 차면 또다시 허위로 선적서 팩토링 거래를 일으켰다.
제조업에서는 재고자산을 가공으로 늘려 매출을 늘리는 고전적인 사례가 눈에 띄고 있다.
직물제조기업인 한국합섬은 재고자산을 증가시키는 방식으로 200억원 가량의 회계를 분식해오다 지난 2004년 적발됐다. 일반적으로 공장 내 생산라인 위에 놓인 '재공품' 등에 대한 정확한 측정이 이뤄지지 않아 발생하는 유형이다.
은행, 대출 연체자에 이자 빌려줘 부실자산을 정상으로 둔갑
금융업도 허위의 매출채권을 만들어 이익을 꾸미는 사례가 적발되고 있다.
부산저축은행 그룹은 고객돈을 불법으로 굴려 120여개 페이퍼컴퍼니를 운용해 가짜매출을 만들어오다 지난 2011년 적발됐다. 이 과정에서 자기자본비율을 지키고 있는 것처럼 꾸미기 위해 2조5000억원 규모의 분식회계도 감행했다.
부산저축은행은 우선 대출로 나간 돈의 몸집을 속이는 식으로 회계분식을 저질렀다. 빌려주고 못받은 돈을 마치 돌려받을 수 있는 것처럼 처리했다. 불법으로 빌려준 돈을 정상대출로 처리하는 식으로 2조원대의 분식회계를 저지른 것이다.
더욱이 돈을 갚지 못한 사람에게 이자만이라도 갚을 수 있도록 돈을 재차 빌려주기도 했다. 이자만이라도 갚게 함으로써 정상적인 대출로 보이게끔 돌려막기를 손수 해줬다.
이 역시 외부감사인이 분식여부를 식별하기 힘든 교묘한 방법이긴 마찬가지다.
이로 인해 분식회계를 몇 년간 감춰오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러서야 드러나게 되곤 한다. 그 결과 분식 규모가 대형화될 수 밖에 없는게 문제다.
조남희 금융소비자원 대표는 "업종별 분식회계 유형을 뽑아낸다 한들, 수법이 워낙 지능적이라 발견해 내기까지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며 "분식회계가 지속적으로 우리 경제에 충격을 가할 경우 '제2의 IMF'가 오지말란 법도 없다"고 걱정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