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에 이어 특검과 헌재 심판, 이에 따른 정부 및 기업 활동의 위축 등 불확실성으로 우리의 경제 외교 안보 상황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직무 정지된 대통령 대신 행정부를 이끄는 황교안 권한대행의 '광폭행보'가 논란을 빚으면서 정국주도권을 쥔 야당 간에 '협치'를 둘러싼 기(氣)싸움도 점입가경이다.
권한대행체제는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길게는 6개월까지 갈 수 있다. 권한대행의 권한 범위와 관련해 야3당은 “국회와 협의 없이는 일상적 국정운영을 넘어서는 안 된다”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과도적 국정수습 방안을 논의할 여․야․정 협의체 구성은 내용은커녕 회동의 형식을 놓고 줄다리기가 한창이다.
한시적 성격의 권한대행체제로는 어떠한 정책도 독단적으로 밀어붙일 자체 동력이 없다. 새로운 일을 적극 추진하는데도 한계가 있고, 그렇다고 시시각각 대응이 필요한 외교 안보 경제 같은 중요 현안에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다.
야당은 권한대행체제의 한계와 여소야대 정국을 활용해 '박근혜표 정책'을 수술대에 올려놓을 태세다. 여․야․정이 머리를 맞대고 권한대행 권한의 범위와 대상을 정해 국정공백을 최소화하고 탄핵정국의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일이 무엇보다 급하다.
외국투자자들은 우리의 정치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국제신용평가기관 무디스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 가결에 따른 정치 공백이 한국의 국가 신용도에 부정적이라고 밝혔다.
노무라 금융투자는 “박 대통령의 불법적인 영향력 행사와 관련한 정치 추문으로 코리아 디스카운트 가능성이 커졌다”고 진단했다.
봉건적 정치 리더십과 부패한 관료체제, 비상식적이고 예측을 불허하는 정치 후진성이 '최순실 게이트'로 국제사회에 민낯을 드러낸 것이다.
청문회 과정에서 드러난 시대착오적인 정경유착은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악몽을 되새겼다. 국민의 자부심이던 굴지의 대기업들이 권력자의 힘에 눌려 권력 비선에게 줄을 대고 돈을 바치는 일이 음지에서 여전히 이뤄지고 있음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그러지 않아도 한국 대기업 집단은 후진적 지배구조와 총수 독단 경영 때문에 기업가치가 저평가돼 있다. 재벌 총수들이 5%도 안 되는 일가 지분으로 그룹을 좌지우지하는 '황제 경영', 복잡한 계열사 순환출자를 통한 총수들의 기업지배는 '법으로 보장된 부정'과 다르지 않다는 눈총을 받고 있는 처지다.
정치적 불확실성과 국정공백이 심화되면서 부실기업 구조조정, 노동개혁 등 구조개혁은 뒷전으로 밀렸다. 경제성장률이 2%대에 머물 것으로 예측되는 가운데 수출 감소와 세계 보호무역주의 강화 등 대내외 리스크가 중첩되고 있어 경기회복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 고용시장 역시 반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금리 상승과 글로벌 유동성 수축기를 맞아 가계부채 관리는 물론 구조조정에 따른 기업부실 악화 방지, 외화 유동성 확보가 시급한 과제다. 미국의 계속되는 금리인상으로 한미 간 금리에 역전 현상이 벌어질 경우 자본유출에 대한 방어가 힘들고, 가계부채 부담으로 짓눌린 상황에서 기준금리 인상이 불가피한 '진퇴양난'에 빠질 수도 있다.
당장의 경제 살리기도 급하지만 대내외 리스크를 철저히 관리해 시장 불안에 선제 대응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어야 한다는 얘기다.
여․야․정 협치는 내정에서보다 외교에서 더 절박하다. 미국 도날드 트럼프 신 행정부의 대외정책 골간이 드러나면서 미·중 관계가 출렁이고 한반도 주변 환경에도 연쇄 반응이 예상
된다. 트럼프는 대만 문제를 지렛대로 삼아 중국과 협상할 수 있는 현안의 하나로 북핵 문제를 꼽았다. 트럼프의 대외정책이 짜일 앞으로 몇 개월이야말로 한·미 간 외교적 소통이 절실한 골든타임이다.
하지만 트럼프 당선자의 대북인식을 선점하고 보조를 맞추어 보려는 외교적 노력도, 전략도 잘 보이지 않는다. 북한은 “트럼프의 대북정책을 파악하기 전까지는 도발하지 않을 것”이란 유화적 제스처로 이런 틈새를 비집고 들고 있다.
트럼프 진영조차 한국의 누구와 협의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얘기가 나온다고 한다. 황교안 대행 체제에 이 모든 상황을 맡기기엔 태생적 한계가 있다. 여야가 적어도 외교․안보 현안에 대해선 초당적으로 협력해 한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
내년 말로 잡혀 있던 차기 대선이 앞당겨 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 차기 대선주자들도 당겨진 등판 일정에 당황하는 모습들이다. 준비되지 않은 리더십과 정책 아마추어리즘이 고개를 들면서 대북정책이 '산으로 가는' 조짐도 감지된다.
트럼프가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절친'을 국무장관으로 지명하면서 새로운 미·러 관계도 예고되고 있다. 러시아가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면 지금까지 러시아와의 관계에서 중국이 갖던 지렛대가 힘을 잃는다. 점점 긴밀해지는 러시아와 일본의 관계도 우리를 긴장시킨다.
사드 배치 결정 이후 한중관계는 얼어붙었고, 중국은 보복 조치로 우리를 압박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혐중(嫌中) 정서가, 중국 내에서도 혐한 정서가 대립각을 형성하고 있다. 중․미 간 전략적 경쟁이 가열되면서 한국이 선택을 강요받는 경우도 적잖게 예상된다. 역지사지로 서로를 헤아리고 한미동맹과 한중관계를 함께 아우르는 전략적 접근이 요긴하다. 대내외를 통틀어 총체적 위기국면이다.
우리는 역사에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길을 가고 있다. 대통령 직무정지, 탄핵 또는 사임에 의한 대통령 궐위 가능성, 궐위 시 60일 이내의 대선 그리고 헌법개정 이슈까지 한꺼번에 몰려오고 있다. 하지만 가보지 않은 길이 새 로드맵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우선 탄핵 결정까지 계속될 수도 있는 정치적 혼란과 불확실성은 여․야․정이 협치를 통해 슬기롭게 관리해야한다. 우리가 그동안 쌓아온 민주역량과 시스템을 통한 국정운영 역량을 대내외에 내보이며 위기를 기회로 탈바꿈시켜야 한다.
아울러 촛불집회에서 표출되고 있는 국가적 에너지를 제도개혁으로 연결시키는 법적․제도적 장치도 서둘러 마련해야한다. 국가권력의 남용을 막고, 기득권집단의 부패와 정경유착의 고리를 차단하고, '개발 패러다임'이란 이름의 구시대적 국가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국정운영모델을 확립․정착시켜나가는 데 국민적 합의를 모아야 한다.
법치가 제도화되고, 시민사회와 기업의 자율성이 보장되고, 나눔과 공유를 시대정신으로 삼는 민주주의의 새로운 플랫폼을 설계해나가는 일이야말로 대통령 탄핵사태의 의미를 되새기고 촛불민심에도 부응하는 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