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사이더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45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미국사회와 세계가 큰 충격에 빠져있다.
트럼프 당선자의 성격이 독특한데다 그동안 내걸었던 공약이 워낙 파격적이어서 미국 국내정치는 물론 세계화와 자유무역, 이민, 동맹, 지정학적 대외관계 등 기존질서에 불확실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세계 도처에 극우주의와 자국 이기주의 바람이 거세지면서 대외환경이 각자도생(各自圖生)으로 각박해지고 있는 것도 우려스럽다.
투표 하루 전날까지 힐러리 클린턴후보의 당선가능성을 85%에서 99%까지 점쳤던 미국의 여론조사기관들, 선거운동기간 내내 트럼프 '흠집 내기'로 클린턴을 일방적으로 편들었던 주요언론들도 체면을 크게 구겼다. 여론조사 무용론과 함께 '언론 대국' 미국의 신뢰도 크게 금이 갔다.
트럼프의 그간 행적과 발언을 두고 미국인인 것이 부끄럽다고 했던 미국의 지식인 집단도 허탈감에 빠졌다. 대선 불복 및 반(反) 트럼프 시위로 미국 전역이 시끌벅적하고, 차기대통령이 미국사회를 더욱 분열시킬 것이라는 우려들도 곳곳에서 고개를 든다.
하지만 2006년 조지 W 부시대통령 이후 10년 만에 공화당이 백악관은 물론 상원과 하원을 모두 장악한 선거결과는 단순한 트럼프후보 개인에 대한 호․불호를 넘어 미국 정치의 일대 지각변동임은 부인키 어렵다. 트럼프의 당선을 그저 '충격', '공포', '대이변'으로만 볼 수 없는 측면이 하나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 미국 대선의 가장 큰 패배자는 현상유지에 안주해온 미국 기득권집단 및 그 정치다. 대선은 표면상 민주-공화 양당 대결로 치러졌지만 워싱턴 정가는 당을 초월해 트럼프를 배척했다. 오바마 대통령 부부와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등 민주당 인사들은 물론이고, 부시 가문과 폴 라이언 하원의장, 존 메케인 상원의원 같은 공화당 지도자들도 트럼프에 등을 돌린 선거였다.
경제 침체와 양극화로 미국인들은 새로운 정치를 갈망했고 그 열망과 분노는 '1%대 99%' '월가 점령시위'로 표출된 바 있다. 하지만 양대 정당과 정치권은 수 십 년 묵은 낡은 정치와 재계-군수산업-지식인 팅크탱크-미디어로 연결된 기득권구조에 안주하며 이런 민심의 분노와 요구를 외면해왔다.
경선과정에서 요란했던 트럼프 돌풍과 민주당의 '샌더스 현상'도 분노한 민심이 그 동력이었다. 미국 젊은이들을 열광시킨 버니 샌더스 후보는 클린턴을 싸고도는 민주당의 기득권 벽을 넘지 못했다. 클린턴은 퍼스트레이디-국무장관-월가와의 유착 등 자신이 기득권의 한 상징으로 변화의 주체가 아닌 변화의 대상으로 인식되면서 샌더스 지지자들의 표를 충분히 끌어 모으지 못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클린턴 못지않은 패배자라는 분석도 주목을 끈다. 클린턴은 지지율 55%의 오바마 인기에 기대며 오바마의 정책과 노선의 계승을 다짐해 '오바마 3기 정부'라는 핀잔을 자초할 정도였다.
트럼프 당선으로 오바마의 '공든 탑' 오바마 케어(국민건강보험)와 이민개혁, 동성 결혼 합법화 등 인권신장, 총기규제법 추진, 기후변화 대처, 협력을 통한 새로운 국제질서의 구축 등 어렵사리 이뤄온 진전들이 물거품이 될 운명에 처했기 때문이다.
오만한 엘리트 집단, 기성 제도권에 대한 국민의 실망과 분노를 외면하고 '엘리트주의'에 빠진 미국 유력 언론들은 그 권위와 명성이 동반 추락했다. 유력 언론들은 트럼프와 트럼프 지지자들을 상식에 어긋난 '정신 나간' 집단으로 간주하며 멕시코 국경 장벽 설치, 여성과 무슬림 및 장애인 비하, 성추문과 음담패설 등 트럼프의 비상식적인 언행에 집중포화를 퍼
부었다. 지구촌의 유력 미디어들도 미국 유수 언론들의 보도를 그대로 받아쓰며 트럼프를 무슨 선거판의 '괴물'처럼 취급해왔다.
세계화로 일자리가 사라지고, 몰려드는 이민자 때문에 자신들의 정치적 목소리가 약해지고, 제조업과 광산업 등으로 힘들여 얻은 경제적 과실이 월가와 소수 부유층에게 집중되어가는 세상에 대한 대다수 백인유권자들의 분노와 박탈감이 트럼프의 '비상식'을 덮고 그의 백악관행을 결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신문이 미국 근로계층 불만과 불안의 깊이를 미처 잘 감지하지 못했다며 사후 반성문을 내놓았을 정도다.
'미국 우선',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트럼프의 슬로건은 공화당노선도 민주당노선도 아닌, '트럼프주의'로 불린다. 대외정책면에서 동맹의 틀을 새롭게 짜고 기존의 무역협정을 미국 기업과 노동자들에게 더 유리한 쪽으로 손질하겠다고 기염이다. 이는 안보와 동맹, 자유무역을 중시하는 162년 전통의 공화당 기조와 배치된다.
다자 안보체제나 동맹의 가치 보다 사업가적 관점에서 미국의 이익을 먼저 따지려드는 것은 정권을 초월해 70년간 유지해 온 전후 세계질서와 동맹체제 자체를 뿌리째 뒤흔드는 발상이다. 불법이민 차단을 위한 국경 방벽 설치와 불법이민자 전원 추방, 무슬림 입국 금지 등 '분열적 행태'는 포용적이고 다원적인 미국의 가치에도 역행한다.
미국이 1970년대 후반부터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개방주의라는 세계질서를 주도해오는 과정에서 부(富)가 일부에 집중되고 불평등은 깊어졌다. '변화'를 외쳤던 민주당 오바마 8년 집권도 이를 해소하는데 역부족이었다.
미국이 이제 모든 동맹을 지킬 수 없고, 자유개방의 기수와 '세계경찰' 역할을 더 이상 지탱할 여유가 없다는 트럼프의 근본인식이 바탕에 깔려있다. 이런 미국우선 주의를 국제사회가 '신고립주의'로 질타할 수만은 없다.
트럼프가 내세운 공약은 물론 그대로 밀어붙이기에는 부담이 너무 크다. 실용주의가 몸에 밴 기업인이기 때문에 대선 전략과 당선 이후 행보는 많이 다를 것이고, 핵심공약이었던 이민정책과 건강보험법과 관련해서 벌써부터 다소 완화된 입장을 보이기 시작했다.
미국이라는 거대 국가를 책임지게 된 트럼프는 분열된 공화당과 야당인 민주당, 기존 정치에 성난 백인 지지층과 '트럼프는 내 대통령이 아니다'라고 외치는 나머지 절반의 미국인들, 그리고 '트럼프의 미국'을 불안해하는 주요파트너 국가들 사이에서 최적의 흥정과 해법을 끌어낼 수밖에 없다.
외국과의 동맹도, 자유무역협정도 틀 자체를 송두리째 뒤엎기보다는 미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다시 교섭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트럼프는 대선승리 연설에서 “전 세계에 말하고 싶다. 우리가 미국의 이익을 우선으로 하지만 모든 사람, 모든 국가를 공정하게 대할 것이다”, “적대감보다는 공통점을, 갈등보다는 파트너십을 모색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과정에서 우리의 대응과 협상전략이다. 화급을 다투는 시기에 불행하게도 우리는 리더십 공백 상태를 맞았다. 주한미군비용 부담문제는 물론 동맹외교와 경제․통상, 만에 하나 트럼프의 대북 빅딜의 가능성에도 선제적인 대비가 필요하다. 하야든 2선후퇴든 국정정상화를 위한 대통령의 결단은 하루가 급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