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정부와 규제철폐, 자유시장과 열린 국경을 핵심가치로 삼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1980년대부터 정착된 글로벌 경제질서다. 세계화를 통한 공동 번영이라는 모토아래 각국은 국경을 열고 규제를 철폐하고 민주․시장경제체제를 갖추는데 안간힘을 쏟아왔다.
세계화는 곧 시장개방이다. 세계화가 진전될수록 경쟁이 치열해지고 빈부격차가 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코앞의 빈곤문제는 해결했지만 분배와 균형을 소홀히 해 불평등과 양극화를 심화시켰다. 규제철폐와 자유경쟁에 몰두한 나머지 세계화를 주도해 온 선진국에서조차 자유민주주의 기반인 중산층이 몰락하는 사태를 불러온 것이다.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브렉시트는 단순한 영국의 EU 탈퇴를 넘어 지난 30여년 지속되어온 글로벌 경제질서 전반을 흔드는 신호탄이라는 점에서 문제는 심각하다. 미국과 함께 이 질서의 한 축을 담당한 영국이 세계화에서 이탈했다는 점은 충격이다.
그동안 반(反)세계화, 신자유주의 비판은 경쟁에서 낙오된 약자들의 볼멘소리, 또는 진보진영의 판에 박힌 발목잡기로 치부돼 왔다. 그러나 세계화의 이익이 글로벌기업이나 자산가, 엘리트계층에 독점되고 소득 및 기회의 불평등과 그로 인한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는 공감대는 계층과 나라를 막론하고 급속히 확산되어왔다. 급기야 세계화를 밀어붙였던 선진국 자신이 위기에 빠지고, 각자도생의 생존방식으로 스스로 세계화를 부정하는 행태를 보이면서 글로벌 경제질서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
질서의 균열은 의외로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왔다. 영국은 신자유주의를 세계에서 가장 먼저 도입, 전파하고 글로벌 금융허브로 세계화의 혜택을 가장 많이 누려온 나라의 하나다.
더구나 영국은 미국의 EU 개입을 위한 지렛대였다. EU탈퇴로 영국이 더 이상 미국의 유럽연합대리인이 되기를 거부한 것이다. 이는 EU의 외교적 자율공간이 더 넓어진다는 의미다. 이미 독일은 우크라이나 내전과 관련한 러시아 제재에서 미국의 강경 입장에 반기를 든 바 있다.
EU 쪽의 자율공간 확대는 러시아와의 관계개선과 시리아 내전 등 중동분쟁 해결에도 기여할 수 있다. 미국이 사우디아라비아와 손잡고 시리아의 정권교체에만 집착하는 한 시리아 내전 등 중동 분쟁은 해결되기 어렵다. 서방과 러시아, 이란이 손을 잡고 시리아 내전에서 이슬람국가를 패퇴시키는 것이야말로 유럽 난민사태의 근원을 차단하는 길이 된다.
브렉시트를 '자해(自害)적 결정'이니 '정치선동'으로 몰아치는 것은 단견이다. 유럽연합과 영국의 마찰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유럽통합 초창기 영국은 설립멤버가 아니었고 뒤늦게 가입한 후에도 통합 심화에 이의를 제기하고 이를 견제하는 역할을 해왔다.
영국은 경제적으로 영연방국가들과, 군사안보적으로는 미국과의 특수 관계에 더 중점을 두는 경향이다. '영광스런 고립'정책에 입각해 유럽대륙의 갈등과 분쟁에서 국외자로서 '균형자'역할을 하려는 정서가 지금도 강하다.
영국민들의 EU 탈퇴결정은 미래의 생존에 대한 불안, 정치․사회 리더십에 대한 불신, EU 체제에 대한 불만이 상호 증폭되면서 분노로 폭발한 데 있다.
도화선이 된 이민노동자 급증은 EU의 급속한 확장 때문이다. EU가 동유럽으로 확장을 시작한 1993년 이후 영국 내 외국 출신 노동자는 두 배인 600만 명, 전체 노동력의 10%로 늘었다. 동유럽 저임 노동자 때문에 일자리와 임금상승 기회를 빼앗기고 있다는 불만의 가스가 중․ 하류층에 질펀하게 깔린 상황이었다.
EU에 대한 분담금은 네 번째로 많이 내면서도 돌아오는 혜택은 적고, 중동 난민의 대규모 유입에다 테러 위협까지 겹치자 이민자에 대한 적의는 증폭됐다. 독일이 주도하는 EU 긴축정책은 런던의 금융자본과 독일 이익에 부합될 뿐 독일을 제외한 EU 전체 경제의 침체와 실업, 이에 따른 불평등을 확산시키고 있다는 불만들이 가세했다.
이민자와 소득격차에 EU가 무기력하고 영국의 주류 정치권과 지도층 또한 이같은 대중의 고충과 불만을 아랑곳 않자 '못 살겠다 바꿔보자'는 심정으로 국민투표에서 고립을 선택한 것이다. 물론 인기영합주의자들의 부추김도 큰 역할을 했다.
영국의 '영광스런 고립'은 미국의 '트럼프 현상'과 맞닿는다. 무역에서의 보호주의, 정치에서의 미국 우선주의, 이민자에 대한 차별주의 등을 내세운 트럼프는 도시 중․하층민, 농업지역, 쇠락한 공업지역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다. 영국 같은 저항투표 바람이 미국에서도 분다면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될 수도 있고, 당선이 안 되어도 힐러리 클린턴은 어떤 식으로든 트럼프 현상을 정책에 반영할 수밖에 없다.
세계화의 기치 아래 움직여 온 세계경제가 보호주의나 고립주의 내지 자국우선주의로 물꼬를 틀고 있음은 분명하다. 영국 경제는 파운드화 약세와 금융 서비스 부문 손실 등 단기적으로 타격을 받겠지만 협상을 통해 상품과 자본 이동은 자유롭게 하면서도 사람의 이동은 제한하고 유럽의회나 재판소의 간섭을 받지 않게 된다면 장기적인 손실은 그리 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영국의 탈퇴는 영국보다 EU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더욱 증가시켰다. 탈퇴의 부정적 효과가 크지 않을 경우 영국의 전례를 따라 그리스와 같은 약한 고리들이 유로존에서 떨어져 나갈 가능성도 있다.
미국 주도 세계질서에 대한 중국과 러시아의 변경 욕구가 거세고 일본의 전열 재정비도 호흡이 가쁘다. 미국 우선주의 외교의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아시아 재균형 전략도 약화 또는 변형될 가능성이 크다.
각자도생으로 세계경제의 저성장이 고착화되고 무역증가율이 경제성장률보다 낮아진다면
수출주도형 성장으로 '세계화 스쿨의 우등생' 노릇을 해 온 한국의 생존전략은 큰 난관에 맞닥뜨리게 된다.
엊그제 박근혜대통령은 세계적인 보호무역주의와 신고립주의 추세를 대외지향적 개방전략으로 극복해야한다고 역설했다. 사태의 심각성에 비추어 너무 한가한 소리로 들린다.
대외적 경제 환경 악화와 함께 남북관계와 주변국 외교도 정책적 딜레마에 봉착하고 있다. 북한이 사실상의 핵보유국인데도 언제까지 비핵화를 위한 압박과 제재외교에만 매달리고 있을 것인가.
우리 내부의 양극화와 세대 갈등은 이미 위험수위로 올랐다. 주류 정치권과 국가 리더십이 적절한 해답을 내놓지 못하면 직접민주주의 방식의 국민투표에서 극단적 선택으로 이들의 분노가 표출될 수도 있다. 브렉시트는 먼 바다 건너 불이 아니다.
안으로는 격차와 불평등을 줄이고, 반세계화의 역류와 맞닥뜨리며 '신자유주의 이후'에 대비하는 외교․경제 전략의 새 판짜기에 국가적 지혜를 모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