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구조조정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구조조정의 키를 쥐고 있는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지난달 26일 산업·기업 구조조정 협의체 3차 회의 모두발언에서 “조선, 해운, 철강, 유화 등 전통 주력산업의 경영여건이 구조적으로 악화되고 있고 이러한 흐름은 조만간 개선될 전망이 없다”며 “경쟁력을 보완하거나 시장에서 퇴출하는 등 '사즉생(死卽生)'의 각오로 구조조정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지금 한국의 주력산업은 바람 앞에 촛불 신세다. 조선·해운 업계는 글로벌 경기침체로 침몰 직전이다. 철강·석유화학 업계는 과잉공급과 중국 업체들의 파상공세로 코너에 몰렸다. 상장사 10개 중 3개는 돈 벌어 이자도 못 갚는 '좀비기업' 들이다.
구조조정은 시장과 채권단 중심으로 이뤄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지만 채권단과 경영진이 책임을 떠넘기며 구조조정을 미적거릴 경우 정부가 개입할 수밖에 없다. 구조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야 할 산업은행 마저 조선·해운 부실을 떠안아 지난해 2조원 가까운 적자가 난 상태다.
기업 구조조정이 산업개혁의 핵심과제로 본격화한 것은 작년 말부터다. 정부는 지난해 10월 정부 내 협의체를 구성해 산업별 경쟁력 강화 및 구조조정 방향을 논의해왔다.
구조조정의 상시화를 지원하기 위해 기업활력 제고를 위한 특별법(일명 원샷법)을 통과시키고, 기업구조조정촉진법(기촉법)을 재입법해 제도적인 틀도 마련했다. 원샷법은 기업 구조조정에 필요한 인수ㆍ합병 절차 등을 간소화한 법이고, 개정된 기촉법은 워크아웃 대상 기업을 중소기업까지 확대한 게 주요 내용이다.
정부가 산업개혁카드를 꺼내 든 것은 통화ㆍ재정정책을 통한 경기부양책만으로는 저성장국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수출과 내수의 동반 부진이 장기화되고 저금리에 의지한 좀비기업들이 성장 동력을 갉아먹는 상황에서 이들 한계기업을 구조조정하고 신성장동력을 발굴하는 혁신기업들에 자원을 집중시키는 산업재편이 불가피해졌다.
총선에서 지역 민심을 의식해 정부 여당이 구조조정을 미적거리는 사이 제1당이 된 더민주당이 적극적인 구조조정 필요성을 강조하고 나서면서 구조조정 추진에 더욱 힘이 실리는 형국이다. 구조조정 협의를 위한 '여·야·정(與·野·政) 정책 협의체' 구성도 추진 중이다. 방식과 전제 등에 있어 입장차는 크지만 구조조정 필요성과 방향만은 여야가 일치한다.
문제는 구조조정의 구체적 실행방식이다. 구조조정이 성공하려면 우선 전체를 포괄하는 큰 그림이 있어야하고 이를 실행하는 액션플랜과 타임플랜(시간표)이 마련돼야 한다.
금융위원회가 발표한 구조조정 추진체계는 경기민감 업종, 부실징후기업, 공급과잉 업종 등 3개 트랙으로 나눠 각기 특성에 맞게 동시 추진한다는 내용이다.
제1트랙은 조선·해운 등 경기민감 업종으로 정부 내 협의체를 통해 구조조정의 기본방향을 제시하고 이를 기초로 채권단이 개별기업의 구조조정을 추진한다.
제2트랙은 부실징후기업에 대해 기촉법에 따라 채권단과 재무구조개선 약정 및 워크아웃․ 회생절차를 통해 상시적 구조조정을, 제3트랙은 공급과잉업종에 대해 원샷법에 따라 인수합병이나 설비감축 등을 자율적으로 추진해 선제적 구조조정을 추진한다는 내용이다. 요약하면 해당 업체에 자구 노력을 촉구하고 필요하면 지원한다는 얘기다. 물론 부실 징후 기업이나 업종 등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법적 제도를 통해 상시적이고 선제적으로 구조조정을 할 수 있는 준거를 마련했다는 점은 큰 의미가 있다.
하지만 '사즉생'의 결연한 의지나 사안의 절박성을 읽을 수가 없다. 수주절벽에 직면하면서 지난해 8조5000억 원의 영업 손실을 기록한 조선 3사에 대해서도 인력감축 비용절감 등 자구책을 요구하는 수준에 그쳤다.
기업 구조조정과 효율적인 산업 재편에 성공하려면 정부의 단호한 의지와 적절한 타이밍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조선 빅3가 일감을 확보 못해 독이 비어 가는 사이에 일본과 중국 조선업계는 신속한 구조조정을 통해 세계 조선업 1위 한국의 아성을 크게 위협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2700여개 조선소를 51개로 줄이는 고강도 방안을 밀어붙이고 있다. 일본과 중국 조선업계의 구조조정 속도와 규모를 고려하면 우리의 구조조정안은 한가한 느낌마저 든다. 대마(大馬)도 부실하면 정리한다는 강력한 신호를 시장과 업체에 줘야 한다.
내년부터는 대선 정국이라 구조조정에 주어진 시간은 8개월 정도다. 이런 시간 제약 하에서 구체적인 타임플랜이 없다면 추진돼야 할 구조조정의 총체적인 비용과 편익의 추산이 어렵다. 이는 결국 구조조정의 당위성을 약화시키고 필요한 재원 조달 방법이나 규모 등에 혼선을 가져오기 마련이다.
조선․해운의 경우 현상 유지와 부문별 통폐합, 해외 매각과 인수합병(M&A)등 어떤 시나리오로 전개되느냐에 따라 필요한 돈이 수조원에서 수십조원으로 크게 달라진다. 구조조정에 필요한 재원을 선제적으로 확충해야한다며 한국형 양적완화로 한국은행을 압박하는 것은 청구서도 내밀지 않고 지갑부터 내놓으라는 얘기와 다를 바 없다.
지금의 구조조정은 우리경제를 이끌어온 주력산업이 근본부터 흔들려 이를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한 차원에서 요구되고 있다. 평소 같으면 구조조정의 당사자인 기업과 채권자가 머리를 맞대고 시장자율로 계획을 세워야 하겠지만 지금처럼 절박한 상황에서는 정부가 구조조정의 주도권을 쥐고 합리적인 리더십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
해당 업계에 구체적인 조건을 제시하고 이를 맞추지 못할 경우 피도 눈물도 없는 구조조정을 단행하겠다는 원칙을 제시하는 일이다. 구조조정 청사진을 조속히 마련해 정치권과 국민에게 이해를 구해야 한다.
구조조정에 투입되는 자금은 재정투입이든 발권력 동원이든 모두 국민이 부담한다. 한국은행 발권력에 의지할 것인지, 재정을 투입할 것인지는 명분 논쟁에 불과하다. 어떤 방법으로 마련할지에 대해 정부는 구체안을 내놓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실업대책 역시 추상적인 말보다는 여야정과 노사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합의안을 만들어내야 한다. 구조조정은 올해를 넘기면 실패한다. 민간자율에 맡기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다.
구조조정은 썩은 곳을 도려내는 것이다. 약을 먹고 연명할 단계는 지났다. 고통스럽다고 대충 봉합하면 나중에 더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수술을 계속 미적거리면 기업부실이 금융 부문으로 전이되고 자본이탈과 함께 나라경제 전체가 큰 위기에 휘말릴 수도 있다. 지금이야말로 사즉생의 결기가 필요한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