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중계동 백사마을 풍경. 서민 삶의 애환이 녹아있는 곳이다.
여행은 평소에 경험하지 못한 색다른 즐거움을 느끼고 기억에 담는 과정이다. 쇼핑, 식도락, 유명 관광지 방문 등 투어의 기본 코스를 밟는 것도 좋지만 일상을 벗어나 자신만의 시공간에서 사색에 빠지는 재미도 쏠쏠하다.
서울은 한국전쟁 이후 성장을 거듭해 어느새 세계적 규모의 최첨단 도시로 변모했다. 도심에는 빌딩들이 하늘에 닿을 것처럼 뻗어있고 2000만대에 달하는 자동차가 경쟁하듯 도로 위를 누빈다. 최신식 스마트 기기를 온몸에 두른 채 발걸음을 재촉하는 이들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이렇듯 화려함을 자랑하는 서울이지만 한편에는 시간이 멈춘 듯 느껴지는 공간이 있다. 처음 방문한 관광객에게는 서울의 새로운 얼굴을, 시민에게는 독특한 추억을 선사한다. 편안한 '힐링'과 아련한 향수가 공존하는 이색명소. 자연의 숨결과 삶의 애환이 녹아있어 "서울에 이런 곳이 있었구나"라는 감탄이 절로 나오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도심 속 비밀 정원…부암동 백사실 계곡
◆…백사 이항복의 별장 터. 지금은 주춧돌만 남은 채 흔적을 후대에 전하고 있다.
백사(白沙) 이항복. 조선시대 임진왜란을 극복하기 위해 명나라의 원군을 부르는 등 뛰어난 외교적 활약을 펼친 인물이다. 어린 시절부터 한음(漢陰) 이덕형과 우정을 쌓으며 빼어난 기지를 뽐냈던 오성(鰲城)이 바로 이항복이다.
종로구 부암동 북악산 자락에는 이항복의 별장 터로 추정되는 장소가 있다. 서울에서 보기 드물게 1급수 지표종 도롱뇽과 개구리, 버들치 등이 사는 백사실 계곡이 그곳이다. 북악산의 옛 지명인 백악산에서 백사실이란 지명이 유래했다는 말이 있지만 백사 이항복의 별장 터가 있기 때문에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2번 출구로 나와 KT광화문지사 앞 버스정류장에서 1020번, 7212번 등의 녹색 마을버스를 타면 약 15분 뒤 창의문(자하문) 근처에서 내릴 수 있다. 버스를 조금 더 타고 세검정 앞에서 내려도 되지만 부암동 골목길의 매력까지 느끼고 싶다면 창의문 앞 삼거리에서부터 오르는 게 좋다.
◆…백사실 계곡으로 향하는 부암동 골목길. 정겨운 방앗간 간판이 인상적이다.
한 잔의 커피를 들고 왼편 백석동길을 따라 걷자. 길이 제법 경사져 힘들 수 있으니 천천히 산책하는 기분으로 걷는 게 좋겠다. 걷는 중간중간 뒤를 돌아보면 건너편 인왕산 자락을 따라 뻗은 한양성곽의 절경이 펼쳐진다.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옛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는 부암동 곳곳의 골목길 탐방에 나서는 것도 유익하다.
백사실 계곡으로 향하다 중간쯤 보이는 '고진감래' 벽화는 가는 길이 힘들지만 끝에는 보물이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 담겨있다. MBC 드라마 '커피프린스 1호점'에서 배우 이선균의 집으로 나왔던 산모퉁이 카페도 있어 즐거움을 더한다.
◆…백사실 계곡 입구를 향해 가다보면 등장하는 '고진감래' 벽화와 산모퉁이 카페.
곳곳에 자리잡은 이정표를 따라가다 보면 갑작스레 숲길이 나타난다. 서울 도심 속 비밀 정원이라 불리는 백사실 계곡에 도착한 것. 조금 더 가면 '백석동천(白石洞天)'이 새겨진 바위도 기다리고 있다. 동천은 산천으로 둘러싸인 절경이면서 백사실 계곡 주변에 흰 돌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울창한 숲 안에 계곡이 보이고 넓은 터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그 옛날 이항복이 왜 이곳에 별장을 지었는지 깨닫게 된다. 도심에 있는 것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호젓하다. 나무 벤치에 앉아 근심을 내려놓고 쉬고 있노라면 저절로 힐링이 된다.
◆…도롱뇽이 서식 중인 백사실 계곡. 최근 개체수가 줄고 있어 방문객은 더욱 주의해야 한다.
최근 백사실 계곡 도롱뇽의 개체수가 급격히 줄고 있으므로 계곡물에 들어가는 일은 삼가야 한다.
보물이 숨어있는 청파동 골목길
◆…비좁은 골목길이 깊은 인상을 남기는 청파동.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비좁은 골목길은 80~90년대만 해도 서울의 익숙한 풍경이었다. 도시계획 아래 고급 아파트와 빌딩이 우후죽순 들어선 뒤로는 점점 서울에서 옛 골목을 찾기 힘들어졌다.
지하철 4호선 숙대입구역과 1·4호선 서울역 사이에 위치한 '푸른 언덕' 용산구 청파(靑坡)동은 아직까지 고풍스런 골목을 간직한 동네다. 옛 일본식 주택과 도시형 한옥 등이 오랜 풍상을 견뎌왔음을 말해준다.
◆…청파동에는 아직 옛 풍경이 남아있는 보물 같은 장소가 있다.
처음부터 어린 시절을 떠올릴 수 있는 골목길이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하면 실망할 수 있다. 숨은그림 찾기처럼 느긋한 마음으로 나서야 옛 골목 풍경이 보인다.
성인 남성 키보다도 낮은 담장이나 한 사람이 겨우 통과할 정도로 좁은 골목이 정겹다. 건너편 후암동과 N서울타워가 한눈에 담기는 절경은 언덕과 계단을 열심히 오른 사람에게 주어지는 보너스.
◆…청파동 언덕을 열심히 오르면 그림 같은 풍광이 펼쳐진다.
'서울, 골목길 풍경'을 지은 건축학자 임석재 교수는 "한국의 골목길은 다수의 사람들이 모여 자신들의 공간개념과 조형의식으로 만든 기록"이라며 "청파동은 20세기 집 박물관"이라고 평했다. 청파동 골목길이 더욱 소중한 이유다.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중계동 백사(104)마을
◆…백사마을의 골목은 시간이 멈춰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노원구 중계동 산104번지에 있어 백사마을이란 이름이 붙은 곳. 달이 잘 보이는 동네라는 뜻을 지녔으나 가난의 상징으로 더 와닿는 달동네. 중계동 백사마을은 서울 개발사업 끝자락에 남은 마지막 달동네로 불린다.
백사마을은 1967년 청계천이 복개되면서 철거된 판자촌 주민들이 불암산 자락으로 강제 이주해오면서 생겨났다. 당시 이주 대책으로 주어진 것은 약간의 벽돌과 군용천막이 전부였다.
이후 슬레이트나 기와 지붕을 얹은 집이 조금씩 생겨났으나 거기서 시간은 멈췄다. 산자락에 빽빽하게 들어선 낡은 집들과 답답하게 느껴지는 골목 그대로. 아직도 겨울이면 보일러가 아닌 연탄이 이곳의 필수품이다. 최근 인기리에 방영 중인 드라마 tvN '응답하라' 시리즈보다 더 오래된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백사마을을 화사하게 꾸며주는 벽화. 마을의 역사도 담겨있다.
백사마을의 역사는 동네 곳곳에 그려진 벽화가 잘 전해준다. 서울예고, 영신여고 학생들과 자원봉사자들이 2013년 백사마을의 이야기를 담은 다양한 벽화를 그렸다. 덕분에 벽화마을 출사지로도 유명세를 탔다.
벽화에 적힌 이야기를 따라 산책하듯 둘러보면 서민의 애환이 피부에 와닿는다. 4년 동안 재개발 문제가 난항을 겪었고 많은 주민들이 떠나 지금은 빈집이 많다. 과거 백사마을의 상권이 형성됐던 곳은 간판만 남아있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그래도 아직 삼삼오오 모인 어르신들의 이야기소리가 들려와 푸근함을 안긴다.
◆…백사마을의 주요 상권. 활기가 넘쳤을 그 시절을 짐작하게 만든다.
가쁜 숨을 몰아쉬고 마을 꼭대기에 올라 뒤를 돌아보면 불암산과 중계동의 전경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옛 골목의 풍경과 현대식 아파트가 어우러진 모습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듯 묘한 조화를 이룬다.
담벼락 옆에 쌓인 연탄과 미끄러움을 방지하기 위해 길에 뿌려진 연탄재, 옥상에 널려있는 빨랫감도 정겹다. 동네 강아지들이 마을을 지키려는 듯 이방인을 지켜보는 풍경 역시 향수를 일으킨다. 예전의 활기와 번화 흔적이 마치 영화 촬영장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백사마을의 지킴이인 양 골목 어귀에 늠름하게 자리잡은 강아지.
체코 프라하에는 16세기부터 갖가지 이야기가 더해져 관광 명소가 된 '황금소로'가 있다.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 받는 프란츠 카프카가 이 곳에서 프라하성을 배경으로 한 '성'을 집필하기도 해 더욱 유명해졌다. 많은 관광객들은 황금소로를 찾아 과거의 생활상을 배우고 미래를 꿈꾼다.
서울의 골목에도 추억과 역사가 쌓이고 있다. 관심과 스토리텔링이 필요한 시점이다. 때맞춰 서울시는 가이드북 '시민이 발로 찾은 서울 골목길 명소 30선'을 펴냈다. 프라하의 황금소로처럼 서울의 골목길들이 관광 명소로 발전하길 기대해본다.
◆…백사마을 연탄봉사에 나선 육군사관학교 총동창회. 이곳의 겨울나기 필수품은 연탄이다.
떠나자 서울 여행
걷기 좋은 길이 도처에 자리잡은 서울은 쇼핑의 천국이자 조선왕조 600년 도읍의 역사를 지닌 고풍스러운 도시다. 안전과 편의성이 돋보이는 지하철은 세계적인 수준이고 한강을 따라 수려한 절경이 펼쳐져 신비롭기까지 하다. 첨단을 두른 랜드마크와 옛 인정이 녹아있는 시장은 방문객에게 즐거운 에피소드를 남긴다.
서울시 관광체육국 김덕환 관광자원발굴팀장은 "서울이 관광지로서 갖는 강점은 다양성"이라면서 "전통과 현대적 요소의 어우러짐, 큰 산과 강으로 둘러싸인 풍광의 조화 등 서울의 특색을 최대한 살린 관광정책을 지속적으로 수립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볼거리, 먹거리, 즐길거리를 한곳에 모은 모바일 앱 'iTourSeoul'을 꾸준히 업그레이드해 초행길의 여행자가 반드시 다시 찾는 서울로 만들 것"이라는 포부를 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