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금융이 만만한 동네북이 된지 오래다. 얼마 전 세계경제포럼(WEF)은 국내 금융시장 성숙도를 아프리카 수준으로 평가했다. 우리나라 금융 경쟁력은 87위로 우간다(81위)보다 낮았다.
박근혜 대통령이 “금융부문은 여전히 낮은 순위…” 라며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지적을 하자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은 이를 받아 “4시면 문 닫는 은행이 어디 있느냐” “억대 연봉 받고도 일 안 하는 사람이 많다”며 은행의 경직적인 영업 관행과 임금체계를 대놓고 질타했다. 최 부총리는 이어 국내 금융권 수장과의 만찬에서 ‘우간다, 이기자’란 건배사를 외쳤다. ‘우리 금융이 간다’란 뜻이라지만, 우간다 보다 못한 우리금융을 빗댄 말임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국가경쟁력은 26위인데 금융부문 경쟁력이 아프리카 국가들 수준이라면 얼핏 이해가 안 간다. 조사방법과 비교잣대에 문제가 없지는 않다. 세부 항목 8개 가운데 ‘대출의 용이성’이 119위, ‘금융서비스 이용가능성’ 99위, ‘은행 건전성’이 113위를 기록하며 전체 순위를 끌어내렸다.
WEF 평가는 주관적 설문조사 결과에 크게 의존한다. 대출수요자인 국내 기업 최고경영자들이 설문조사 때 점수에 매우 인색했던 결과로 풀이된다. 국내은행들의 BIS(자기자본비율)나 부실대출비율은 미국이나 일본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낮은 수준인데도 은행건전성은 113위로 나왔다. 15세 이상 인구 중 은행 계좌보유비율은 우리나라가 94.4%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94%보다 높다.
신용카드 이용 비중은 53.9%로 OECD 평균(46.7%)보다 높고, 인터넷을 통한 지불결제 이용비중은 52.5%로 세계평균 16.6%보다 훨씬 높고 OECD 평균 54.1%보다는 약간 낮은 편이다. 그럼에도 금융서비스 이용가능성 순위는 99위로 나타난 것이다.
구체적인 이들 통계보다 기업들이 체감하는 우리 금융에 대한 평가가 형편없이 낮다는 한 방증이다. 금융하면 늘 논란꺼리가 되는 관치금융의 문제, 낙하산 인사 등이 ‘87위’의 주된 배경으로 읽힌다.
금융 개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정권이 새로 들어설 때마다 금융개혁을 강조하고 동북아 금융허브를 만들겠다는 비전을 내세웠지만 금융산업을 글로벌 경쟁력 있는 성장산업으로 발전시키는 데는 이렇다 할 진전이 없었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도 초기에는 금융비전으로 ‘10-10 밸류업’을 제시했다. 금융산업의 부가가치를 10년 내 국내총생산(GDP)의 10%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것이다. 2015년 경제정책 방향에서 금융을 4대 구조개혁 과제의 하나로 제시하면서 IT를 금융과 접목시킨 핀테크와 모험자본 활성화를 강조하고 나섰다.
정부 여당은 지금이 금융개혁의 최적기이자 마지막 기회라면서 과감하고 신속한 추진 의지를 거듭 공언하고 있지만 뭘 개혁하자는 건지 국민 입장에서 손에 잡히는 게 없다.
핀테크에다 ‘천송이 코트’로 상징되는 규제철폐, 기술금융, 창조금융 등등 눈만 뜨면 새로운 화두가 던져진다. 양질의 일자리를 주문하더니 벤처창업의 금융지원을 역설하고 어느새 ‘좀비기업 구조조정’을 다그친다. 개혁의 방향부터가 헷갈린다.
지난 주말 당정은 ‘금융개혁 추진 10대과제’라며 은행영업시간 조정과 연 대출금리 10%대의 ‘징검다리’ 대출상품 추진을 들고 나왔다. 금융노조는 금융산업을 망친 관치금융은 그대로 두고 영업시간 조정과 임금체계 개악을 개혁으로 호도하려한다며 거세게 반발했다.
금융개혁은 개혁의 대상이 금융당국 자신이란 점이 여타 개혁과 다르다. 규제개선과 자율확대로 경쟁을 활성화시켜 금융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려면 당국은 관치의 유혹을 끊고, 금융회사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경쟁에 나서야 한다.
그럼에도 정부와 정치권은 걸핏하면 낙하산을 내려앉혔다. 이명박 전 정부에서는 ‘4대 천왕’, 박근혜 현 정부에서도 ‘서금회’(서강대 출신 금융인)가 눈총을 샀다.
관치와 규제는 금융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면서 시장을 고착화시켰고 그 과정에서 금융사들은 규제와 감독에 길들여졌다. 규제와 감독에 기대면서 변화와 혁신은 뒷전으로 밀리고 임기만 채우면 된다는 보신주의와 개혁에 대한 내부저항을 키워왔다.
보신적인 제도와 관행 타파에 박대통령이 직접 나섰지만 문제는 이들을 서둘러 하향식(톱다운)으로 추진하려는 데 있다. 창조경제 하에서 정부가 추진해온 혁신금융과 기술금융, 핀테크와 인터넷전문은행 등은 사실 금융소비자 요구를 토대로 금융회사 내부에서 경영전략으로 추진할 사업들이다. 정부가 이들을 정한 후 금융회사에게 지원을 강요하는 상황에서 금융회사의 창의성과 혁신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하향식 개혁은 금융을 실물경제 활성화 수단으로 이용하는 또 다른 관치일 뿐이다.
금융산업의 경쟁력은 금융당국의 규제와 심사로 배양되는 것이 아니고 시장에서의 선택에 좌우된다. 자율경쟁의 생태계 조성을 위해 관치금융 폐지의 제도화, 금융 감독체계 개편에 개혁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모바일 기기가 은행창구로 변신하고, 은행직원들이 태블릿 PC를 들고 고객을 찾아가 대출도 현장에서 처리하는 모바일금융시대에 은행점포 수와 영업시간은 큰 의미가 없다.
선거를 앞둔 정치권이 피부에 와 닿는 개혁을 한답시고 은행들을 두들겨 대출을 늘리고 금리나 수수료를 낮추려든다면 금융개혁의 배는 산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다.
저금리시대가 고착화되면서 은행의 수익성이 크게 떨어지고 전통적인 고비용구조의 지점영업방식도 한계를 드러내 은행의 전성기가 끝났다는 비관론도 적지 않다. 동시에 변화하는 IT기술을 적극 활용해 더욱 편하고 안전하고 쉬운 금융서비스 창출을 통한 은행산업의 새로운 지평도 펼쳐지고 있다.
엊그제 금융위원회는 인터넷은행 두 곳에 예비인가를 내줬다. 신규 은행인가는 23년만이다. 예비인가의 주역은 ICT(정보통신기술)기업이다. 한국금융이란 ‘고인 물’에서 이들이 얼마나 ‘메기’역할을 할 것인지가 관심사다.
ICT기술로 무장한 비금융사업자들이 파괴적 혁신으로 금융의 판을 바꾸려면 진입에 대한 규제부터 풀어야한다. 중국의 인터넷금융은 이미 한국을 2년 이상 앞질렀다고 한다. 정보통신기술최강국이라는 한국이 이제 와서 인터넷은행에 첫 발을 내딛는다니 이게 될 말인가.
규제혁파와 관치청산이 먼저고 혁신은 그 다음이다. 기득권에 안주하며 더 이상 머뭇거리면 정말 ‘금융후진국’으로 처질 수밖에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