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규제'를 상징하는 경제민주화를 외치는 정치권의 행보에 재계는 잔뜩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재계의 속내는 불편하기만 하다.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 어느 한 쪽도 자신들에게 유리한 태도를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권의 이런 기류는 대기업들의 경영압박으로 이어질 공산이 큰 상황. 현재 정치권이 쏟아내고 있는 경제민주화 방법론은 대기업들이 더 이상 세를 확장하기 힘들도록 만드는 정책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재계는 경제민주화가 정치논리에 함몰, 맹목적 재벌개혁으로 흘러가는 상황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가뜩이나 유럽발(發) 재정위기 등 경제상황이 좋지 않은 가운데 정치권이 재벌규제의 기치를 올리는 것 자체가 상황에 맞지 않는 엇박자 행보라는 지적이다.
◆ 경제민주화, 왜 지금?
재계의 입장에서 정치권의 경제민주화는 분명 반갑지 않은 손님.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재벌 대기업들이 정부가 허용한 각종 규제완화 특혜를 발판으로 몸집을 불리고 경제적 영향력을 키운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대기업에 대한 각종 규제완화 특혜를 부여하면서 이명박 정부가 노린 효과는 기업투자 활성화가 몰고 오는 '낙수효과'였다. 그러나 대기업들은 사상 최대의 현금을 호주머니에 찔러둔 채 투자지갑을 닫아버렸다.
게다가 문어발 경영전략으로 빵집, 분식집 등 골목상권에까지 위협하고 있는 상황. 일각에서는 재벌규제라는 정치적 프레임을 만든 것은 대기업들의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대기업들 스스로 '경제불평등'을 상황을 만들어 반감을 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을 감안할 때, 대선을 앞두고 있는 정치권이 절대다수인 중산서민층의 감정선을 자극할 최적의 소재인 재벌규제를 선거승리의 핵심 화두로 채택하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재계는 이에 대해 할 말이 많다. 국가경제의 중추인 기업들을 옥죄는 정책기조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게다가 유럽발(發) 재정위기 여파가 한국경제에 무거운 먹구름을 몰고 온 상황에서, 기업들을 흔들어서야 되겠느냐는 입장이다.
다만 경제불평등 해소를 위해 적절한 수준의 대기업 경제력 집중 완화정책을 논의하는 것 자체에 대한 반감은 상대적으로 적다. 정책의도에서 한참 벗어난 수위와 강도, 정치논리에 휘둘린 정책이 나오는 것에 대한 우려는 깊게 형성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경제민주화 정책을 원칙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전제한 뒤 "하지만 단순히 대기업 규제만을 목적으로 추진될 경우 성장과 투자측면에서 여러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대기업에 대한 맹목적 규제가 기업가 정신을 훼손하고 경제 활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 이를 보완할 합리적 대안을 정치권이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라며 "실현가능한 경제민주화 방안을 충분한 논의를 거쳐 도출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 성장보다는 분배, '역류(逆流)'하는 정책기조
지난해 기준 우리나라 국민소득은 2만3749달러로 세계 31위. 1위 룩셈부르크(12만2272달러), 2위 카타르(9만7967달러) 등 최상위권 국가를 비롯해 7∼8만 달러 수준인 노르웨이 등 북유럽국가들과 비교할 때 아직은 현저히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인구 등을 고려할 때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여전히 우리나라는 성장위주의 경제정책 기조가 필요한 국가로 분류되고 있는 실정. 우리나라가 북유럽 국가 수준의 복지를 논하는 데는 아직까지 무리가 있다는 의견도 이를 반증하고 있다.
우리나라와 상황이 비슷한 동아시아 국가들은 기업들에게 세금혜택 등 각종 유인책을 부여해 성장동력을 만들어내는 경제정책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기업은 국가경제 성장의 토대인 것은 분명하다. 기업이 없으면 국가는 먹고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엄청난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유럽의 국가들이 그 동안 유지해 왔던 분배위주의 정책노선을 버리고 성장위주의 정책노선으로 갈아타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이 때, 대한민국은 분명 '역주행'을 하고 있다는 지적이 재계를 중심으로 나오고 있다.
정치권의 경제민주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현재, 기업들의 상황도 좋지가 않다. 사상 최대 실적을 올린 삼성전자와 현대차 등 몇 개 재벌그룹을 제외하고는 실망스러운 실적을 올렸다. 게다가 유럽 재정위기와 미국 경제회복세 둔화 등 글로벌 경제침체가 장기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계속되고 있다.
곤두박질 치고 있는 출산율과, 고령화는 성장잠재력을 해치는 위협요소. 이런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경제성장의 토대인 기업들의 발목을 잡는 정책기조를 선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이 재계를 중심으로 높게 형성되고 있는 모습이다.
◆ "가만있지 않겠다"…반기 들고 '행동' 나선 재계
민주통합당이 출총제 부활, 재벌세 도입 등 수위가 높은 재벌규제 정책들을 경제민주화 화두의 세부과제로 내놓으며 속도를 내고 있는 반면, 새누리당은 박근혜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언급한 순환출자 금지 원칙이외에는 구체적인 방안을 내놓고 있지 않다.
다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의 경제민주화가 유사한 정책대안과 수위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흘러나오고 있다.
현재로서는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이 의견을 같이하고 있는 대목은 재벌소유·지배 구조(순환출자) 개선이다. 새누리당은 대기업의 신규 순환출자 금지, 민주통합당은 기존 출자 3년내 해소를 '방법론'으로 제시한 상태다.
박 전 새누리당 비대위장은 지난 10일 대선 출정식에서 "기존 기업들은 몰라도 신규 순환출자 기업에 대해 허용해선 안 된다"고 말했고, 야권 유력 대선 후보인 문재인 민주통합당 상임고문도 지난 12일 "경제민주화 핵심은 순환출자 금지이며, 기존 대기업들도 규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재계는 정치권의 이 같은 기류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특히 순환출자 문제는 재벌그룹의 '아킬레스건'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정치권이 경제민주화를 명분으로 순환출자 문제를 부각시키는 것은 '재벌 때리기'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에 따라 재계의 발걸음은 점차 빨라지고 있다. 정치권의 경제민주화 폭주에 대응할 수 있는 반대논리를 마련해 홍보를 강화하는 등 전방위 방어태세를 구축하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대한상공회의소, 전국경제인연합회, 한국경영자총협회, 무역협회, 중소기업중앙회 등 경제 5단체 중 4단체 부회장단은 지난 16일 민주통합당 박지원 원내대표와 직접 면담을 갖고 반(反)기업 정책 자제를 요청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