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대통령 선거를 향한 정치권의 경쟁이 본격화되면서, 정치권이 대선 이슈로 꺼내놓은 '경제민주화'에 대한 목소리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의 경제민주화 정책기조는 강약의 차이만 다소 존재할 뿐, '재벌규제'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친기업 정책에 편승, 재벌로 통칭되는 대기업들은 계열사를 늘리고, '골목상권'까지 영역을 확장하는 등 무차별적인 성장가도를 달린 것이 사실. 이 같은 재벌들의 독주는 중산서민층에 상대적 박탈감을 안겨준 것 또한 분명하다.
절대다수의 표심을 머금고 있는 중산서민층의 '카타르시스'를 자극시킬 최적의 소재가 경제민주화 '탈'을 쓴 재벌규제인 것이다. 선거에는 도가 튼 정치권이 일반국민들의 감정선을 자극할, 최고의 재료를 그냥 지나칠 리 없다.
선거는 결국 누가 더 많은 '박수(표)'를 받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얼마나 더 많은 유권자를 열광시키고 우리편으로 끌어 들이느냐다. 다분히 감정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
민주통합당은 지난 9일 출총제 부활, 순환출자 금지 등 경제민주화 실현 9개 입법안을 발의하며 이슈 선점에 나섰고 새누리당도 조만간 정책의총을 열어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 논의를 진행한다는 계획이다.
◆ 경제민주화, 왜 지금?
정치권이 언급하고 있는 경제민주화의 근본 지향점은 '분배'. 그런 측면에서 경제민주화는 갑작스럽게 부각된 이슈가 아니다. 이미 지난 2010년 6·2지방선거부터 시작됐다.
당시 '무상급식'이 정치 쟁점으로 떠오르면서 민주진보 정당들이 대승을 만들어냈다. 이후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정치생명을 걸고 뛰어들었던 무상급식 찬반 주민투표, 시민운동가 출신 박원순 서울시장의 탄생까지 민주진보 정당들의 승리가 이어졌다.
서울시장 재보선 패배로 위기의식을 느낀 새누리당은 결국 '좌클릭'을 선택, 4·11 19대 국회의원 총선을 앞두고 승부수를 띄웠다. 야권의 움직임에 편승, 복지확대를 선거전략으로 내세웠고 안팎의 예상을 뒤엎고 4·11 총선에서 과반의석을 차지하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4·11 총선결과는 분배에 대한 민심의 열망을 뚜렷하게 확인해 준 계기가 됐다. 4·11 총선을 진두지휘한 박근혜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도 지난 2007년 이후 유지해 왔던 이른바 '줄푸세(세금 줄이고, 규제 풀고, 법질서 바로 세우자)' 정책기조를 과감하게 버렸다.
민주통합당은 4·11 총선에서는 패배했지만, 기존의 정책노선을 철폐하지 않고 오히려 강화하는 선택을 했다. 이해찬 대표가 "경제민주화에 당의 명운을 걸겠다"고 선언할 만큼 절박함을 표출하고 있는 상황.
4·11 총선에서 증명된 민심은 정치권으로 하여금 분배를 지향하는 경제민주화를 시대적 과제로 세팅하게끔 만들었다. 대선을 5개월여 앞둔 현재, 정치권의 행보는 경제민주화의 구체적인 실현방안을 요구하는 민심의 동향에 자연스럽게 올라 탄 것으로 풀이해 볼 수 있다.
◆ 경제민주화, 정치권 '손익계산서'
일각에서는 '선거의 여왕'으로 불리는 박 전 비대위장의 존재감이 새누리당의 4·11 총선 승리를 이끌었다는 분석도 나오지만, 노선변경에 따른 부동층 끌어안기가 제대로 먹혔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새누리당은 4·11 총선을 앞두고 새로 제정한 정강정책에 '경제민주화-일자리-복지'를 앞에 넣어 쇄신의지를 대내외에 보여줬다. 총선 전 한 여론조사기관이 진행한 여론조사 결과, 정당혁신 신뢰도 평가에서 새누리당(47.3%)이 민주당(38.5%)을 누르기도 했다.
'부자정당', '1% 특권정당'이라는 오명을 들었던 새누리당의 변화는 총선 승리로 이어졌다.
야권의 패배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다.
"후보단일화 전략 등 정치 이벤트를 통한 바람몰이에 매몰, 지방선거 당시 무상급식과 같은 정책 대안을 효과적으로 제시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정치평론가 고성국 박사는 "야권이 제대로 된 이슈, 아젠더 세팅에 실패했기 때문에 총선에서 패배한 것"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이 대선을 앞둔 시점, 경쟁적으로 경제민주화를 전면에 띄우며 주도권 다툼을 벌이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라는 분석. 앞으로 나올 대선공약에서 경제민주화의 구체적 실현방안을 요구하는 민심과 궤를 같이 하지 않는다면 대선 승리는 요원하다는 지적이다.
이슈의 효과적 선점이 선거승리로 이어졌다는 것이 4·11 총선에서 극명하게 드러난 만큼, 한 치의 양보 없는 싸움이 대선 직전까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로서는 양 진영의 경제민주화 정책기조의 우열을 가리기는 힘들다. 민주당이 한층 강도가 높은 방안들을 내놓으며 치고 나간 상태이지만, 새누리당도 조만간 구체적인 경제민주화 실현방안들을 내놓고 맞불을 놓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기 때문이다.
◆ 경제민주화, 결국 '포퓰리즘(Populism)'?
경제민주화 이슈 선점을 놓고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이 극한 대립구도를 형성한 가운데, 일각에서는 개혁의 대상인 재벌들의 반발에 부딪혀, 실효성 있는 정책을 내놓지 못할 경우 경제민주화가 결국, '포퓰리즘(Populism)'이 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로 지난 4·11 총선과정에서도 정치권은 재정여건을 제대로 감안하지 않은 채 경쟁적으로 복지확대 정책을 쏟아내며 포퓰리즘 논란을 스스로 부추겼다. 최근 벌어진 0-2세 영유아 보육예산 고갈사태가 좋은 사례다.
지금 당장은 이슈의 불을 지핀 단계이기 때문에 강공 드라이브를 유지할 필요가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개혁 대상으로 지목된, 재벌들의 공세에 일정부분 방향전환이 가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아울러 콘텐츠의 부족 현상이 빚어져 종국에는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이 내세우는 정책기조에 차별성이 사라질 것이라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이필상 고려대 교수는 "정치권의 경제민주화 바람은 포퓰리즘 성격이 강하다"며 "재벌개혁을 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현재까지 그 대안으로 중소기업을 어떻게 육성할 지에 대한 정책들이 제시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경제민주화는 재벌개혁과 함께 중소기업 육성, '투 트랙'으로 가야한다. 여야가 정책경쟁을 벌이고 있지만 대기업들이 나중에 투자를 하지 않겠다고 하면 또 도움을 요청할 것"이라며 "(출총제 등이)근본적인 재벌개혁의 정책인 것은 맞지만 굉장히 위험하다. 외국자본으로 잠식될 수도 있어 대안을 준비하면서 단계적으로 가야한다"고 강조했다.
정치평론가로 활동 중인 신율 명지대 교수도 "새누리당의 경제민주화 정책은 평가할만한 근거가 충분치 않다"며 "말만 할 뿐 지금 내놓은 것은 솔직히 민주통합당보다 못하다"고 지적했다.
신 교수는 이어 "재벌이 기형적 구조인 것은 맞고 경제민주화가 시대적 흐름이기 때문에 지금 구체적 정책이 없어도 (새누리당이)민주당의 안을 답습할 수도 있다"라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