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11월 전군표 前국세청장의 낙마로 취임한 한상률 前국세청장은 살얼음판을 걸었다. 대선을 앞둔 미묘한 시기에 국세청장에 취임해 정권이 바뀔 경우 새로 탄생할 정부에서의 신임여부도 문제였지만, 자신과 관련한 갖가지 확인되지 않은 루머들이 나도는 등 심한 외풍으로 좀처럼 안정을 찾지 못했다.
반면 이 시기 안원구 대구지방국세청장은 어땠을까. 그는 스스로 "지금의 정부가 태동할 때 힘을 보탤 수 있도록 나름대로 국세행정에 관한 다양한 청사진을 준비해왔다"고 말할 만큼, 꿈에 부풀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보다 훨씬 전인 그 해 추석을 전후해서도 그는 자신을 찾아온 지인이 "대구청장을 마치면 국세청 핵심요직인 조사국장 정도는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덕담에 대해 "나는 그 보다 더 큰 꿈을 꾸고 있다"고 말한 것에서도 쉽게 추측이 가능하다.
실제로 한 前청장이 재신임 여부를 두고 힘겨운 싸움을 하던 때와 시기를 같이해 국세청 안에는 그(안 국장)의 차장 승진설이 파다했다. 국세청 간부를 지낸 몇몇 인사들은 "대구청 간부들로부터 안 대구청장이 곧 국세청 차장으로 승진할 테니 미리 축하전화나 인사라도 해두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받기도 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반면 국세청 안에 주류를 형성하던 안 국장보다 선배기수인 간부들 사이에서는 "안원구가 너무 컸다. 그가 차장에 중용되면 다른 간부들이 무더기로 사퇴해야 하는 격변이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는 안정적인 국세청 운영이 안 된다"는 기류도 점점 커지고 있었다.
■ 서울청 세원관리국장 발령…추락의 시작
한창 높은 꿈을 꾼 것으로 보이는 안 국장에게 시련이 닥쳤다. 국세청 차장의 4개월 공석과 국세청 사상 유례가 드문 조사기획과장이 조사국장을 장기간 겸임하는 등 파행인사를 거듭하다 유임에 성공한 한 前청장이 고위공무원 인사 때 대구청장인 그를 서울청 세원관리국장으로 낮춰 앉힌 것.
안 국장은 최근 공개된 비망록에서 "지방청장이던 본인을 초임 국장자리인 서울청 세원관리국장으로 발령을 냈다"며 "이는 2단계 좌천인사로 아마도 국세청 초유의 일"이라고 썼다.
이후 안 국장은 종종 "한 청장이 내게서 단물만 모두 빨아먹었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며 불쾌함을 감추지 않았다.
당시 안 국장에 따르면 한 청장은 유임과 재신임이 불확실하던 시기에 안 국장의 소개로 소위 '실세'들을 만날 수 있었으며, 소개 이후 한 청장은 안 국장을 제치고 소개받은 인물을 직접 만나고 다녔다.
그는 또 "내가 (국세청) 차장이 되려고 뛰었다는 것은 억지주장"이라며 "지금도 또 그런 오해를 받을까봐 숨을 죽이고 산다. 이 국장실(자신의 방)을 제외하고는 누구를 만나지도, 또 밖으로 돌아다니지도 않고 있다"고도 했다.
■ 미국 국세청 파견이라니…내가 입만 열면
안 국장과 한상률 前국세청장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게 된 것은 올 초 단행된 국세청 국장급 인사직전 한 청장이 그에게 '미국 국세청 파견국장'자리를 권유했을 시점일 것이다.
당시 국장실에서 기자와 만난 그는 무척 격앙돼 있었다. 찻잔을 쥔 손이 부르르 떨고 있을 정도였다.
그는 "한 청장이 전화로 미국 국세청에 파견을 나갈 것이냐. 아니면 국내에서 국방대학원이나 중앙공무원교육원으로 교육파견을 갈 것이냐 선택을 강요했다"며 "그래도 국내에 잔류하겠다고 뜻을 전했는데 기어코 나를 미국으로 보내려고 한다"고 분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와 함께 그는 "영어를 잘하는 후배들이 있어 내가 대안까지도 제시했는데, 영어를 전혀 못하는 나를 시험까지 치르게 해서 미국으로 보내려 하는 저의가 뭐냐"며 "대구청장에서 서울청 국장으로 보냈으면 됐지 나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다고…"라며 말끝을 잇지 못했다.
그는 특히 그 자리에서 "한 청장 그 사람은 뭐 훌륭한 사람인지 아느냐. 내가 지금 입을 열면 그도 결코 그 자리를 유지하지 못할 것"이라며 "적어도 나는 한 청장의 치명적인 약점을 3가지는 알고 있다"는 말까지 했다.
이처럼 한 청장에 대한 감정이 극에 치닫고 있던 당시 그는 지인들로부터 "아무 소리말고 미국에 다녀와라. 한 청장이 그리도 미우냐. 아무리 그가 미워도 세월과 젊음이 그를 이긴다. 미국에 다녀오면 이미 한 청장은 국세청을 떠나고 없을 것"이라는 조언도 들었다.
■ 터지는 그림사건…발설자로 지목되다
안 국장이 미국 국세청 파견인사에 대해 극도로 분개하고 있다는 소식은 곧바로 한 前청장에게 알려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한 청장은 "나에게 치명적인 약점이라니. 그것도 3개씩이나 된다니. 나에게 그런 약점은 없다"고 단호한 입장을 보였다는 것.
한 청장은 더 나아가 안 국장에게 사람을 보내 "폭로하려면 해라. 너 역시 감옥에 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그를 윽박했다.
그리고 일주일의 시간이 조용히 흐른 뒤 '학동마을' 그림과 관련한 기사가 某일간지에 짤막하게 언급됐고, 그 다음날 가인갤러리 홍가인 대표의 인터뷰기사가 신문지상을 도배했다.
곧바로 언론에 의해 홍가인 대표의 실명이 홍혜경씨며, 홍씨는 안 국장의 아내라는 사실이 연이어 밝혀졌다. 이후 안 국장은 그림사건 발설자로 지목돼 홍역을 치르게 된다.
■ 11시간의 감찰실 감금 그리고 사퇴압력
1월12일 그림사건 연루의혹이 터진데 이어 곧바로 이어진 경주 골프파문으로 한 청장은 의혹제기 1주일만인 1월19일 불명예 퇴진했다.
한 청장이 "아쉬움과 미련 그리고 미움과 원망도 모두 버렸다"며 국세청을 떠나던 날 퇴임식이 열렸던 서울 수송동 국세청사 2층 대강당, '서울청 세원관리국장'이라는 명찰이 붙은 한 자리는 비어 있었다.
바로 안 국장의 자리였다. 행사가 종료될 때까지 이 자리는 비어 있었다. 이를 두고 행사장 안에 있던 국세청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가 무슨 얼굴로 이 자리에 나타나겠느냐"는 말이 나돌았다.
그러나 나중에 밝혀진 사실은 이 시간 안 국장은 국세청 감찰담당관실이 있는 청사 14층 밀실에 핸드폰마저 빼앗긴 채 감금돼 있었다.
같은 시간 국세청 감찰직원 2명은 안 국장의 아내가 운영하는 갤러리에 들이닥쳐 그림을 사간 기업체 명단을 확보했고, 이를 통해 안 국장의 미술품 강매확인서를 받기 위해 기업체를 방문하는 등 안 국장의 사퇴압력에 총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 안 국장 퇴임 결심…반전?
거센 퇴임압박에도 불구하고 안 국장이 집요하게 버티자 한 전 청장의 불명예 퇴임후 국세청의 구원투수로 등장한 허병익 국세청장 직무대행은 한 前청장 퇴임직후 단행한 국장급 인사에서 안 국장의 미국 국세청 파견대상 자격은 그대로 유지시켰다.
이 무렵 안 국장 처리에 매진했던 국세청 감찰조직은 안 국장이 서울청 조사1국장 시절 아내가 운영하는 화랑을 통해 조사대상 업체에게 그림을 강매했다는 내용을 뼈대로 하는 '문건'을 작성한 것으로 관측된다.
이후 곧 퇴임시킬 것만 같았던 국세청 감찰의 집요한 움직임은 갑자기 멈춰진 것으로 감지됐다. 안 국장 후원세력의 누군가가 나선 결과가 아닐까 하는 추측들만 무성했다.
이후 6월 초순까지 안 국장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져있었다. 간간이 "안 국장은 지금 뭐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만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미국 국세청 파견을 위한 안 국장의 영어시험 합격소식이 늦어지면서 허병익 국세청장 직무대행은 뜻밖의 결심을 한다. 누군가 안 국장 대신이라도 미국에 파견돼야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영어시험을 치를 것을 명령한 것.
비슷한 시기 안 국장은 당시 유력했던 허 차장의 국세청장 영전설이 현실화되면 자신의 설자리가 없음을 느낀 것인지, 아니면 자신에 대한 사퇴압력이 수그러들자 긴장감이 풀어졌기 때문인지 국세청을 떠날것도 한 때 결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비망록을 통해 공개한 일종의 '고별사'에서 "부당함에 굴하지 않고자 부단히 애썼으나 혼자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며 "국세청 앞날의 바람직한 청사진을 남겨두고 떠나고자 한다"고 썼다.
또 "전직 수장 개인이 저지른 과오로 국세청 전체가 비리와 음모의 본체인양 매도되고, 그 결과 5개월 동안이나 조직의 수장도 없이 표류하는 비극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란다"며 "미국 국세청 파견명령을 받고 준비중에 사직하게 됐으므로, 그 동안 일하지 않고 받은 급여는 모두 반납하고자 한다"고 적은 것 등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그러나 6월 들어 생각이 바뀐 안 국장이 그동안 실패했던 영어시험 합격을 강하게 자신하면서 상황은 급하게 반전됐다. 이번엔 그의 영어시험 합격을 못하게 하려는 국세청의 작업도 시작됐다.
그가 6월말로 예정된 영어시험 합격에 강한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는 <조세일보> 보도가 나간 직후 국세청은 안 국장에게 '공문'을 통한 국세청 출근명령을 내린다. 미국 파견을 위해 여러 가지 공부를 미리 해놔야 한다는 것이 출근명령의 이유.
허병익 국세청장 직무대행의 지시를 받아 박인목 총무과장이 내린 명령으로 전해져 있다.
안 국장에게 일을 하려고 마련해 준 장소는 서울지방국세청 조사국 423호 빈방. 이곳은 2국 조사반원들이 쓰다가 비좁다는 이유로 보다 넓은 다른 장소로 이동했기 때문에 비워져 있던 방이었다.
일개 사무관이 쓰던 방에 그것도 대구지방국세청장까지 지냈던 자신에게 쓰도록 한 것에 대해 안 국장은 또 다시 크게 분개한다.
그곳에서 기자를 만난 그는 "이곳 4층 옆방은 내가 조사1국장 시절 쓰던 국장실"이라며 "다른 곳도 아닌 이곳 그것도 사무관도 비좁아 쓰지 못하는 방, 게다가 과거 내 부하직원들이 득실거리는 이 곳을 쓰라니 국세청이 나의 마지막 자존심까지 건드렸다"고 했다.
그는 또 "다시는 국가공무원법의 보호를 받는 공무원이 국세청에서 나가라한다고 나가고, 나가지 말라고 해서 나가지 않는 잘못된 관행을 뿌리뽑겠다"며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한 前청장에서 국세청 조직으로 적개심 대상을 옮긴 그는 423호 방에서 영어공부에 더 매진했다. 그리고 6월27일 치러진 시험에서 그는 몇 번의 실패를 딛고 합격한다.
시험에 합격하지 못해 '을'의 입장에 머물렀던 그가 이제 '갑'의 위치로 돌변했다. 그는 "즉각 합격사실을 국세청에 통보하려 했으나, 아무도 통보를 받지 않으려 했다"며 "미국에 보내려 했고, 시험까지 합격했으면 보내줘야 하는 것 아니냐"며 목소리가 커졌다.
허병익 국세청장 직무대행으로서도 속수무책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미 자신의 명령으로 안 국장과 나란히 시험에 합격한 다른 간부의 문제도 있기 때문. 허 차장이 선택한 방법은 결국 사퇴압박이었다.
■ 양보없는 대치…그리고 검찰수사
자신에 대한 사퇴압박이 지속되는 사이 백용호 공정거래위원장이 국세청장으로 내정되자 안 국장은 큰 기대를 하게됐다. 백 청장 역시 '정치인' 출신인 만큼 어떻게든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 역시 '안원구라는 카드'를 쉽게 버리지 못할 것 같은 확신이 있는 듯했다.
백 청장이 내정되고 청문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자신에 대한 사퇴압박이 줄어들지 않자 안 국장은 혼란에 빠진다. 대체 누가 주축이 돼서 나를 몰아내려고 하는지 세력의 주체가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다양한 각도로 자신을 몰아내려 하는 주축세력이 청와대인지 아니면 국세청 안의 누구인지를 찾으려 했지만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부터 국세청 사퇴압박에 대응하는 그의 방법이 달라졌다. 만나는 모든 사람과의 대화내용을 녹취하는 방법을 택한 것. 심지어 자신의 절친한 친구와의 대화까지 녹취한 것으로 드러났다.
백 청장 취임 이후 국세청은 안 국장 문제를 '조용하게 처리한다'는 방침대로 움직였다. 그러나 백 청장 하에 새롭게 진용을 갖춘 국세청으로서도 안 국장 처리 문제에 기본적인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관측된다.
바로 안 국장 퇴임을 강하게 밀어붙였던 감찰조직이 이미 만들어 놓은 '문건'이 발목을 잡았기 때문.
안 국장에게 그가 원하는 미국 국세청 파견을 해도 문제였고, 국세청에 계속 근무하도록 해도 문제였다. 이미 만들어진 '문건'을 무시하고 안 국장을 계속 기용했다가는 나중에 더 큰 화살이 국세청으로 날아올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또 오해에서 비롯됐던 아니던 간에 안 국장과 관련된 좋지 않은 이미지가 2만명 국세청 직원들 사이에서 굳어진 상황에서, 안 국장에 대한 중용은 국세청 전체 조직의 운영에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라는 판단도 한 몫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국세청의 조용한 사퇴권유에 안 국장이 더 세게 나온 것도 문제였다. 안 국장은 "내가 만약 죄를 지었다면 법과 원칙대로 처리하라. 나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며 더 큰 소리를 쳤다. 결국 안 국장과 국세청은 누구도 양보할 수 없는 평행선을 유지하며 지루한 대치가 계속됐다.
이후 새롭게 진용을 갖춘 검찰이 미뤄뒀던 안 국장에 대한 수사에 착수하면서 지루한 대치상황은 끝났지만, 10여개월 동안 안 국장이 모진 사퇴압력을 받아내며 준비했던 폭로가 이어지며 세상이 시끄럽게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