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여느 날과 다름이 없는 날이다. 가슴은 텅 비어 차갑고, 마음은 한없이 무거운 날…….

한 달에 한 번은 나를 탈탈 털어놓고 시린 손만 만지작거리다 한숨 쉬며 집으로 돌아오는 날, 오늘은 남편의 월급이 들어오는 기쁘고도 우울한 날이다.

남편이 파스와 진통제로 버티면서 하루하루 저축해 놓은 고된 노동을 통장에 찍히는 작은 숫자로 확인하고 그 숫자들을 더 작게, 작게 쪼개서 새 모이 주듯이 흩어놓고 나면 통장의 숫자들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빈 통장을 손에 쥐고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못난 어미의 마음이 전부인 것을 확인하는 그날이 오늘이다. 그랬다. 언젠가부터……. 생활이란 것이, 산다는 것이, 어제가 오늘인지, 오늘이 어제인지 모르고 같은 색깔과 익숙한 냄새로 가득한 이 생활이 행복이라고 믿으며 최선을 다하는 나 스스로에게 위로하고, 그럼에도 늘 밝고 건강한 착한 아이들과 남편에게서 위로받는 것이 당연한 일상이 되어 버린 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부터 오늘은 좀 특별하다. 통장을 손에 들고 있는 나의 가슴은 누가 들을까 봐 부끄러울 만큼 쿵쾅쿵쾅 뛰고 있었다. 이게 뭐지? 통장에 잔액이 너무 많이 남아 있었다.

나는 평소에도 내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이웃인 보경 엄마에게 달달 떨리는 손으로 통장을 내밀면서 "보경 엄마, 이거 한 번 보세요. 월급 말고도 돈이 더 있어요. 이런게 보이스피싱 아닐까요?"

이 말을 하는 나는 마치 엄마 호주머니 속에 몰래 손을 넣고 딸그닥딸그닥 동전이라도 몇 개 훔친 아이처럼 떨려오는 마음과 두려움을 감출 수가 없어서 다시 은행 안으로 숨듯이 들어가 버렸다.

텁텁한 밖의 날씨와 달리 은행 안의 시원한 바람이 발그레 열이 오른 내 얼굴을 쓰다듬듯이 감싸며 맞아주었다. 영문도 모르고 다시 은행 안으로 들어온 나를 따라서 보경 엄마도 들어왔다.

평소와 다른 모습의 나를 놀란 눈으로 지켜보던 보경 엄마는 통장과 나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통장을 찬찬히 들여다볼 마음의 여유가 없이 덤벙거리는 나와는 달리 꼼꼼하게도 통장을 보더니

"언니 세무서에서 돈을 입금했는데요? 무슨 돈이에요?" 하며 도리어 나에게 물어왔다.
"세무서에서? 왜?"
"언니, 일단 보이스피싱 이런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렇겠지?"
"일단 집에 가셔서 세무서에 전화해 보세요"하며 나를 안심시켜 주는 보경 엄마가 고마웠다. 나는 놀라고 궁금한 게 많았다. 세무서에서 이렇게 큰 돈을 왜 나에게 주는 걸까? 아닐 거야. 잘못 보낸 것이 분명해.

복잡한 머리와 쿵쾅거리는 가슴으로 어떻게 집까지 왔는지도 모르게 나는 집으로 왔다. 잠시 생각을 해보고 다시 한 번 통장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잔액에 표시된 숫자는 변함없이 나를 놀라게 했다.

나는 태연한 척 애를 쓰며 세무서에 전화를 했다. 신호가 가는 동안 나는 이 돈이 정말 내게 주는 돈이기를 바랬다. 나도 참……. 그래서 떨렸다.

잘못 입금된 돈이니 돌려달라고 하면 어쩌나 하고 두려워하는 내 모습이 우습기까지 했다. 혹시 돌려달라고 하더라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행동하리라고 다짐하며 전화기를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세무서 직원 분이 전화를 받는 순간까지도 이런저런 마음에 기대와 실망을 반복해서 상상하는 마음이 아이의 콧김에도 나풀거리듯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네~"하며 밝은 목소리로 답해주신다.
"저 사실 오늘 통장을 봤는데요. 세무서에서 큰 돈을 입금했어요. 아무래도 뭔가 착오가 있으신 것 같아요. 확인 좀 해주세요"

나는 마음과 달리 더듬더듬 앞도 뒤도 없이 세무서 직원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 분은 이런 내가 보이기라도 한 것처럼 너무나 친절하게도 몇 가지를 차근차근 물어보셨다. 그리고는 전화기 너머에서 입가에 미소가 번진 목소리로

"선생님, 지난 번에 근로장려금이랑 자녀장려금 신청하셨죠?"하고 물어보셨다. 나는 대답할 정신도 없어서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때 신청하신 근로장려금과 자녀장려금이 입금된 거에요"라고 하시는게 아닌가!

순간 내 머릿속에는 몇 달 전 시간들이 조각조각 떠올랐다. 근로장려금과 자녀장려금을 신청하라고 세무서에서 우편물이 왔었다. 전화기로 편지에 나와 있는 숫자만 입력하는 참 편한 방법으로 간단히 신청했던 내 모습이 떠오르면서 이걸 신청한다고 모두에게 주는 것은 아닐 테니 난 해당사항이 없을 거라며 기대의 마음을 내려놓던 모습까지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나는 또 더듬더듬거리며 "그럼 이 돈 주시는 건가요?"하고 한심하게 물어보았다. "써도 되나요? 저는 잘못 보내신 건 줄 알고 떨렸어요" 나는 부끄러운 것도 잊고 직원 분에게 속마음을 하나씩 말하고 있었다.

엄마에게 응석부리는 아이처럼 묻고, 또 물으며 확답을 한 번 더 듣고 나니 이제야 실감이 났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쓸게요"하며 여러 번 머리 숙여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전화기를 손에서 내려놓았다.

그 다음 어제와 다름없는 우리 집인데, 좀 전과 하나도 변함이 없는 이 공간에 마법이 일어나고 있었다. 늦둥이 막내를 임신한 후 손발 저림이 너무 심한 나머지 누워서 잠을 자질 못했다. 그래서 열 달을 꼬박 앉아서 자야만 했던 그 시간들…….

낡고 낡은 저 소파가 남편만큼이나 푸근한 침대로 나를 지켜주었다. 그래서 온통 해지고 여기저기 찢어져서 솜사탕 같은 솜뭉치가 삐죽삐죽 나왔다.

볼품이 너무도 없는 우리집 소파가 지금 이 순간 너무 예뻐 보이고, 낙서로 가득한 벽지도, 쿰쿰한 곰팡이 냄새가 풍기는 우리 집도 말할 수 없을 만큼 깨끗해 보이고, 향긋한 냄새로 가득한 것은 내 마음이 행복해서 생기는 마법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또 다시 행복한 한 순간을 상상하며 쿵쾅쿵쾅 빠르게 심장이 뛰고 있었다. 이 소식을 전하면 가족들이 모두 행복해 하겠지만 남편이 가장 행복해하며 좋아할 것이다.

남들이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새벽 5시면 일을 시작하는 사람, 무거운 짐에 종일 운전대에서 졸리는 눈을 비벼가며 남편 노릇, 아빠 노릇, 자식 노릇에 항상 마음도, 몸도 무거운 남편이다. 여전히 운전하고 있을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 남편에게 어서 이 좋은 소식을 전하고 싶은데…….

"지현 아빠" 이 한 마디만 나오고 가슴속에서 뜨거운 감정들이 울컥 올라와 목을 콱 막아버리는 게 아닌가?

"왜 그래? 무슨 일이야?" 하고 놀래서 묻는데 코끝이 시리고 매워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얼마나 좋아할까?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좀 전의 상황을 설명했다. 근로장려금과 자녀장려금으로 이렇게 큰 돈이 우리 통장에 들어왔다고 말해주었다. 예상대로 남편은 너무 좋아했다.

나처럼 정말 써도 되는 돈인지 의심을 했지만 내가 설명을 해주자 남편은 아이처럼 좋아하며 "당신 쓰고 싶은데 써~"하며 웃었다.

저런 말도 얼마나 해보고 싶었을까? 결혼하고 20년 동안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 것이 아닌 것에는 쌀 한 톨만큼도 마음을 담지 않고 내 몸으로 내 손으로 벌어오는 돈만이 내 것이라고 천 번, 만 번 당연하게 생각하며 알뜰하게 살았다.

그런 우리에게 이렇게 큰 돈이 그냥 생겼으니 너무나 감사하고 고마운 일이었다. 이제 이 소중한 돈을 어디에 어떻게 의미 있게 써야 할까 하고 행복한 고민을 시작해본다.

잠시 잠깐의 생각에 수십 가지가 떠오르며 또 목이 메여 왔다. 못난 부모가 되어서 자식이 하고프다 말하고, 먹고프다 말해도, 가지고 싶다, 입고 싶다 말하는 모든 것에 나는 인색했다. 남들처럼 못해 준 것이 가장 먼저 떠올라서 실컷 먹이고 사주고 싶었다. 참 못난 어미가 아닐 수 없다.

그 생각도 잠시 친정 엄마와 시어머니 두 분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시려온다.

넉넉하지 못하게 사는 우리 모습에 혹시 짐이 될까봐 애써 더 행복하게 밝게 지내는 모습으로 안심시켜 드리려 노력하지만 진짜 가난이 무엇이고 진짜 배고픔이 무엇인지 세월의 마디마디마다 알고 계신 두 분이 보시기에 우리는 참 애가 타고 아픈 손가락 같은 자식이 분명했을 것이다.

그런 부모님께 자식 노릇하며 웃으시는 모습이 너무나 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나는 못난 부모이고, 못난 자식인가 보다. 초등학교 고학년인 딸에게 부모로써 해준 것이 너무 없다는 것에 또 눈물이 난다.

결혼하고 10년 만에 기적처럼 선물처럼 나에게 온 딸아이, 착하고 반듯하게 자라주는 것도 고마운데 공부까지 잘하는 기특한 딸에게 여태 책상도 마련해 주질 못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이 돈이 더욱 소중하고 감사했다. 행복한 상상을 얼마나 했을까? 작은 녀석이 유치원에서 돌아올 시간이 되었다. 나는 서둘러 아이를 데리러 유치원으로 갔다.

천사 같은 아이는 폴짝폴짝 뛰며 선생님께서 주신 비타민을 손에 꼭 쥐고 나에게 와락 안겼다. 행복하다. 그리고 비타민을 꼭 쥔 주먹을 나에게 내밀었다.

"엄마! 눈감아 봐. 선물이야" 한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른 척 눈을 감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짠, 짜잔"하고 웃으며

"엄마 드세요. 안 먹고 가져왔어요"하고 사랑스럽게도 말한다. 오늘 왜 이렇게 행복한 날이지? 그렇게 행복한 엄마와 행복한 꼬마는 집으로 왔다.

저녁 시간이 가까워지고 남편도 딸아이도 모두 모이는 즐거운 시간이 왔다. 남편과 나는 평소보다 더 환한 표정으로

"지현아, 뭐 가지고 싶은 거 없어?"하고 묻자 "엄마! 나는 하늘에 있는 진짜 헬리콥터 사주세요. 또 뽀로로 물총이랑 폴리 슈팅카도 사줘요"하며 작은 녀석이 선수를 친다.

소방헬기가 높이 떠서 날아가는 것을 보고 작은 팔을 쭉 펴고 작은 다리로 폴짝폴짝 뛰어오르며 헬리콥터를 잡으려고 했던 모습이 생각난다. 많이 갖고 싶었나 보다.

"그래 엄마가 사줄게"
대답할 기회를 놓친 지현이에게 다시 물어보았다.

"저는 괜찮아요. 태형이 사주세요. 갖고 싶은 거 없어요. 엄마"하며 철이 너무 빨리 들어버린 딸이 말했다.

"아니야. 엄마가 진짜 사주고 싶어서 그래. 말해도 돼"하고 다시 물어보자 딸아이는 두 눈을 반짝반짝거리며 "진짜?" 한다.
몇 시간 전 세무서 직원 분에게 묻고 또 묻던 나처럼 의심도 하며 장난 가득한 목소리로 물어온다.
"세무서에서 너희들을 위해 쓰라고. 자녀장려금이라는 걸 주셨어. 그것도 아주 많이", "와~. 진짜"그러더니 "엄마! 그럼 저……. 수학 학원에 보내주면 안돼요?" 하는 게 아닌가?

또 가슴이 먹먹해 온다.

"학원 다니는 애들 따라 하기가 힘들어요. 집에서 혼자 문제집으로 공부해도 되지만 정말 어려운 건 이해가 잘 안 돼서"

여태껏 학원은 생각도 못했다. 방과 후 학교 영어수업만 다녀도 좋은 성적은 물론이고 학급반장도 되어 오는 착한 딸이다. 어려운 엄마 형편을 말하지 않아도 잘 알아주고 이해해 줄거라 믿고 학원 못 보내는 것에 크게 마음을 쓰지 못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생각이 있어도 힘들어도 나에게 말하지 않고 있었나 보다. 잠시 생각하고 있는 나에게

"엄마, 그냥 해본 소리야. 집에서 공부 더 할게요. 부담 갖지 마세요. 학원 안가도 돼. 히히히"

돈 때문에 걱정하나 싶었는지 나를 위로해 준다. 이런 딸이 있어서 난 또 행복하다.

"아니야. 엄마가 수학 학원 보내줄게. 학원 보내라고 주신 돈이나 다름없어. 그동안 신경 못써서 미안하다"

딸에게 학원을 보내주마 하며 비로소 엄마다운 약속을 하고 나는 너무나 기뻤다. 착하고 이쁜 딸에게 또 뭐하고 싶거나 먹고 싶은 것은 없느냐고 물어보았다.

"먹고 싶은 거 엄마가 해주는 떡볶이요. 그게 최고로 맛있어요" 하고 예쁘게도 웃는다. 그 사이 저녁식사를 끝낸 남편이 "지현아! 하고 싶은 것도 있으면 말해 봐"하며 한 번 더 기회를 주었다.

이번엔 딸아이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지더니 "그럼, 아빠! 우리 캠핑가면 안 돼?"하는 것이다. 남편과 나는 동시에 "캠핑?"하고 되물었다.

"네~. 친구들이 방학 때 가족들이랑 캠핑 다녀온 얘기를 많이 해요. 여행 다녀온 것도 많이 자랑하고. 우리 가족은 그런 추억이 없으니깐 이번에 다 같이 캠핑 가는 게 어때요?"

저 하나만을 위한 가지고 싶고 하고 싶은 걸 말하라고 했는데 기특하게도 저런 깊은 생각까지 하고 있다니……. 남편과 나는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너무 기특한 딸아이 때문에 또 행복해진다.

"그래. 캠핑 가자. 그치만 우린 캠핑 장비도 하나도 없고. 경험도 없으니깐 대여해 주는 곳으로 가야 되는데 괜찮겠어?" 아빠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네. 캠핑이면 어디든 다 좋아요. 엄마, 아빠, 태형이랑 다 같이 갈 수만 있으면 모두 다 좋아요"하며 이제야 어린아이답게 웃는다.

오늘은 너무나 행복한 날이다. 그래. 이제 이 소중한 돈을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할지 나는 알 것 같다. 그리고 세금을 납부한다는 것이 얼마나 크고 자랑스러운 일인지도 알 것 같다. 성실하게 납부해주신 많은 분들 덕분에 오늘 나에게 특별한 하루가 생긴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너무도 행복한 마법 같은 오늘 하루에 깊이 감사한다. 이런 마법 같은 하루가 다른 집에도 많이 주어질 수 있도록, 내 딸아이처럼 많은 아이들이 환하게 웃을 수 있도록 마법사의 반짝이는 별가루 같이 반짝이는 어른이 되리라고 스스로 약속해본다.

수기작성자 : 울산광역시 이ㅇㅇ(울산세무서 출품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