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이 사실상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헌재는 지난 9일 12차 변론에서 선고 전 최종 변론을 앞두고 나머지 주요 일정을 사실상 확정했다.

국회와 대통령 측에 각자 주장을 정리한 서면을 23일까지 제출해달라고 요구했다. 이정미 소장 권한대행이 퇴임하는 3월 13일 이전에 결론짓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다.

지난달 3일부터 시작한 변론은 14일까지 총 13차례가 열렸다. 22일까지 3차례가 더 예정돼 있다. 유력하게 거론됐던 2월 말 선고가 사실상 물 건너가면서 '시간 끌기'가 길어진다는 비판이 나오자 헌재는 12차 변론에서 출석하지 않은 증인은 직권으로 채택을 취소하고 향후 증인도 납득할 이유 없이 나오지 않으면 재소환하지 않기로 했다. 

대통령 측 추가 증인신청과 대통령이 심판정에 직접 출석하는 등 변수는 남아있지만 더는 재판지연 행위를 용납할 수 없다는 헌재의 의지는 확고해 보인다.

탄핵심판이 이처럼 급박하게 돌아가자 헌재판단에 영향을 미치려는 기도들이 판치고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선 재판관의 면면과 성향을 멋대로 분석하며 탄핵을 둘러싼 '기각설' '연기설' '3월 대란설'이 무차별로 유포되고, 이런 루머들을 악용한 '가짜 뉴스'도 춤을 추고 있다. 장외 여론전이 과열되면서 탄핵 소추에 대한 옳고 그름을 떠나 탄핵 자체에 색깔론을 덧씌워 진영대결로 몰아가고, 여야가 각기 지지층 결집에 나서면서 국론분열을 부추기고 있다.    

대통령 측 지연작전으로 3월 13일까지 탄핵 결정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게 탄핵연기론의 요지다. 결정 기일이 연기돼 7명의 재판관으로 탄핵을 심의하면 장외 '태극기 세력' 의 외압 가세로 십중팔구 탄핵이 무산될 것이라는 게 탄핵 기각설이다.

탄핵이 인용되든 기각되든 광장의 촛불과 태극기 세력이 승복을 않아 국론분열과 정치적 내전 상태가 벌어질 것이라는 게 대란설의 핵심이다.

헌재의 이정미 소장권한대행이 “법정 밖에서 공정성을 훼손할 수 있는 억측이 나오는 것은 매우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며 “재판 신뢰를 떨어뜨리는 언행을 삼가 해 줄 것”을 국회 소추위원과 대통령 대리인단 양측에 당부했을 정도다.  

헌재는 1987년 민주화 항쟁의 산물이다. 첨예한 갈등의 순간마다 국민통합을 이끌어내 길지 않은 역사 속에 신뢰를 쌓았다. 일본의 공법학자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 그들에게 없는 제도인 우리 헌재를 반드시 찾아볼 정도라고 한다.

박대통령의 파면여부는 대한민국의 운명을 가름할 중대 심판이다. 재판관 모두가 자신의 이름 석 자를 걸고 의견을 밝히도록 돼 있다.

8명의 헌법재판관 중에 박근혜 대통령과 여당이 점지한 사람이 5명이나 되지만 대통령 탄핵처럼 국민의 이목이 집중된 중차대한 사안에서 헌법재판관은 임명권자를 의식하지 않고  재판관의 양심에 따라 주권자인 국민을 납득시키고 역사 앞에서 떳떳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고, 헌재의 재판권도 국민이 부여한 권력을 위임받아 행사하기 때문이다.

대통령 탄핵 결정의 판례는 2004년 국회가 노무현 당시 대통령을 탄핵 소추했을 때가 유일하다. 당시 헌재는 “탄핵 결정은 단순한 헌법이나 법률의 위반 여부가 아니라 그 위반사항이 중대하여 국민의 신임을 배신하고, 더 이상 대통령으로서 국정을 수행하는 것이 어려

울 정도에 이르렀는지에 달려 있다”고 천명했다.

'파면'을 통해 일종의 징계책임을 묻는 탄핵심판은 철저한 사실조사와 혐의 입증을 필요로하는 형사재판과는 다르다. 개략적인 사실조사를 통해 탄핵소추 사유가 대통령이라는 막중한 지위에서 국민이 선거를 통해 부여한 신임을 박탈할 정도의 위헌 혹은 위법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하면, 바로 파면결정을 내릴 수 있다. 형사상 유무죄를 가리는 철저한 사실조사는 탄핵인용결정으로 대통령이 파면된 후 기소돼 형사재판에 넘겨졌을 때 법원이 하면 된다.

박대통령 법률대리인단은 13가지 탄핵소추 사유 전부를 부인하고, 철저한 변론주의와 증거주의로 형사재판처럼 끌고 가 시간을 벌면서 여론전을 통한 보수지지층 결집으로 '막판 뒤집기'를 시도 중이다. 탄핵반대 집회현장에선 '박근혜를 지키는 것이 보수를 지키는 것' 이라는 진영논리에다, 탄핵 반대를 넘어 '좌파 집권 망국론'까지 등장하고 있다.

대통령 측 지연작전과 여론전, 청와대 압수수색 불발, 박 대통령 대면조사 거부 등 민심을 자극하는 일들이 꼬리를 물면서 뜸했던 촛불집회도 다시 활활 타고 있다. 의원 총동원령을 내린 더불어민주당 지도부와 대선주자들은 촛불집회에, 새누리당 친박계 의원 등은 태극기 집회에 참가해 광장 선동에 앞장서고 있다. 민심이 요동쳐도 이를 자제시켜야 할 정치권이 성난 민심을 부채질하는 격이다.

헌재가 정치적 외압에 흔들리면 재판의 생명인 객관성과 공정성은 담보할 수가 없다. 그런 결정에 어떤 국민이 승복하겠으며 그로 인한 국론분열 등 후폭풍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박대통령 측의 남은 카드는 '고영태 파일'과 대통령의 막판 헌재출석 정도다. 최순실 씨 국정농단 의혹을 폭로한 고영태 씨가 최 씨를 이용해 이권을 챙기려 했다는 통화내역을 근거로 이번 사태가 국정농단이 아니라 고영태 등의 측근 빙자 범죄 쪽으로 프레임을 바꿔보려 안간힘이다.

하지만 탄핵사유의 본질과는 무관해 소송지휘권을 가진 헌재가 이를 받아들여 변론기일을 연장할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대통령이 막판에 헌재에 출석하려 할 경우 헌재가 변론기일을 지정해 주어 '무작정 지연'에 제동을 걸 공산도 크다.

국회의원 정원 300명 중 234명이 탄핵소추안에 찬성했고 지금도 78%의 국민들이 탄핵을 원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지지층을 겨냥한 여론전은 스스로 한계가 있다.

대통령 직무정지가 70일에 이르고, 3월 13일 전까지 가능한 재판관 8인 체제에서 결정을 내려야 하는 헌재의 고충도 국가적으로 헤아려야 한다. 

대통령이 탄핵소추 사유를 부인한다면 정정당당하게 탄핵 심판정에 나와 입장을 밝히고 심판 절차에 협조한 다음 심판을 기다리는 것이 품위를 지키는 길이다. 꼼수를 통한 모면이 아니라 지더라도 정석대로 승부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국민들은 보고 싶어 한다.

종로구 재동(齋洞) 초입 헌법재판소 마당에는 제중원(濟衆院) 설립 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1885년 4월 개원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 국민(중생)을 치유한다는 의미다. 2017년 재동에 이른 봄꽃이 필 때 상처받고 갈라진 국민들 마음을 보듬어주는 결정을 헌재가 내릴 수 있을 것인가. 

때마침 여야 4당이 헌재결정에 승복키로 구두합의까지 한 마당이다. 우리 모두가 진영대결과 헌재압박을 거두고 헌재의 귄위와 판단력을 믿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