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세는 없다'는 정부와 여당의 조세정책 기조가 '거야(巨野)의 힘' 앞에 허무하게 무너졌다.

여야가 그동안 내년도 예산안 심사에서 갈등을 빚었던 누리과정(만 3∼5세 무상보육) 예산을 중앙정부가 일정 부분 직접 부담하고, '재원조달책' 일환으로 고소득자에 한해 소득세를 더 걷는 안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예산안의 법정기한인 오늘(2일) 국회의 벽을 넘을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누리과정 예산편성을 할 수 없다"는 당초 입장에서 한 발 물러나자 그간 거야가 당론으로 밀어부쳤던 '부자증세' 대상에서 법인세율은 빠지긴 했지만 소득세율 인상을 이끌어내면서 명분을 확보하게 됐다. 야당 대표도 "우리 당의 정책에 맞는 세법을 하나 확보했다"고 표현했을 정도다.

법인세율 인상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은 어려운 경제여건을 감안할때 환영받을 일이라는 평가. 하지만 완전히 불씨가 꺼진 것은 아니다. 더불어민주당은 법인세율 인상 문제를 내년 치러지는 '대선공약'으로 가져간다는 방침이다. 

문제는 정치권이 그 동안 정부를 신나게 타박해 왔던 '면세근로자 축소' 부분은 그대로 놔둔채 초고소득 근로자만 정확히 조준한 소득세율 개편에 합의했다는 점이다. 정치적 목적에는 부합할 수 있지만 '조세형평성' 측면을 고려할 때는 과격한 행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제기되고 있다.

또 한번 정치가 조세법의 정신을 휘둘러 넘어뜨리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정치적인 관점에서, '표'만 놓고 볼 때 세부담을 더 지게 되는 초고소득자의 숫자는 많지 않다. 누리과정 예산, 즉 복지는 다수의 표심에 자극을 줄 귀중한 소스다.

무엇이 중했던 것인지, 답은 뻔하다는 이야기다.

넓은 세원, 낮은 세율 버리고 '표적 세원, 높은 세율' 택했다

여야가 합의한 소득세법 개정안은 연 소득 5억원을 넘는 고소득자에게 40%의 세율을 적용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현재 소득세 최고세율(38%)이 적용되는 과세표준(세금을 매기는 기준 금액) 구간은 1억5000만원 초과다. 이 개정안은 주민세까지 포함했을 땐 44%로 그야말로 '살인적 세율'이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의 평균 소득세율(43.3%)보다 더 높아지는 것이다. 

◆…여야는 2일 5억원 이상 과세표준을 신설하고 40%의 최고세율을 도입한다는 내용의 소득세법 개정안 수정안을 국회 본회의에 상정하기로 합의했다. 야당은 최고세율 인상이 소득재분배 효과를 높이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학계는 면세자 축소로 세원 베이스를 넓히는 것이 소득재분배 효과를 높이는데 더 도움이 된다는 지적을 내놓고 있다.

소득세 최고세율은 1990년대 초반까지 40%를 유지하다 2000년대 들어서서 35%로 낮아졌다. 이후 '복지확충'이라는 명분 아래 38%까지 세율을 올랐다가 지난 2014년 최고세율이 적용되는 소득구간을 '3억원 초과'에서 '1억5000만원 초과'로 낮췄다. 

기재부에 따르면 소득세 최고세율이 적용되는 대상자는 4만6000명다.

근로소득 6000명, 종합소득 1만7000명, 양도소득 2만3000명이 최고 세율을 적용받게 된다. 세수효과는 연간 6000억원으로 전망됐다. 구체적으로 과표 6억원을 초과하는 대상자의 세부담은 200만원, 8억원 초과자는 600만원, 10억원 초과자는 1000만원씩 늘어난다.

정치권의 궁극적 목적은 담세력이 있는 고소득층에게 세금을 더 거둬 소득재분배를 개선하겠다는 것인데, 소득세 과세자 비율을 넓혔을 때가 세율인상보다 소득재분배 효과가 더 크다는 연구결과 나오면서 '부자만 봉으로 삼는 일'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대목이다. 

한국경제연구원은 최근 발표한 '소득세 부담, 누진도, 소득재분배 효과의 국제비교 보고서'를 통해 "각종 소득공제(일부 세액공제 포함) 수준을 줄일 경우 현행보다 소득재분배 효과는 높아진다"고 밝혔다.

말없는 다수가 아닌, 할 말은 하는 소수인 고소득층의 조세저항이 들끓을 여지도 있다.  

야당을 중심으로 한 정치권에선 애초 고소득자 증세정책을 카드로 내놓을때부터  전체 근로자의 절반에 달하는 면세자 비율도 줄이겠다는 방침을 언급했다. 부자들에게만 세금을 더 내라는 명분이 부족하다는 판단에서다.

그러나 고소득자만 표적이 된 증세 조치가 현실화될 경우 저소득층에 비해 상대적으로 파급효과가 큰 고소득층의 소비심리가 위축되면서 경제 살리기에 부정적이 영향을 미칠 수 있고, 더 나아가 조세회피 시도를 부추기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포퓰리즘', 세법 누더기 만들었다

보다 근본적으로 들어가면 박근혜 정부의 허황된 복지공약이 상황을 이 지경까지 만들었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감당하기 힘든 수준의 재원이 투입되는 복지공약을 남발했고, 그나마 약속도 제대로 지키지 않으려 하다보니 애꿎은 세법만 누더기가 됐다는 것이다.  

지하경제 양성화 등을 통해 수 십조원의 추가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는 박근혜 정부의 계획은 현재로서는 모두 '꽝'이 됐고, 정작 공약한 누리과정 예산 편성은 등한시한 채 지자체가 부담해야 할 선심성 예산만 잔뜩 증액시키면서 갈등을 조장해 온 것이 사실이다.

결국 누리과정 중단 사태로 번져 여론의 험악해 질 것을 우려한 정치권이 정부를 압박해 누리과정 예산 확보와 소득세율 인상을 맞바꾸는 최악의 '흥정'을 하게 된 것이다.  

대다수 조세전문가들은 '넓은 세원-낮은 세율'이라는 원칙을 가지고 세제개편을 추진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정부도 이 기조에 맞춰 조세정책방향의 틀을 짜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정치는 다른 나라에 비해 면세자 비율이 지나치게 높은 문제를 안고 있음에도, '높은 세율'만 외칠 뿐, '넓은 세원'을 구현하는 일은 뒷전인 모습이다.